제9화 전태일과 옥수린

by bookground

그 두려움이 현실이 되는 데에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태일의 입에서 옥수린이라는 이름이

다시 등장하는 데에도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느 날 전태일이 아주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나 내일 여행 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 말이 없었기에 난 의아해하며 물었다.


"갑지가? 여행을?"


"응. 내 친구 지율이 알지? 걔랑 몇몇 배우 친구들이랑"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서운함이 몰려왔다.

나랑 같이 여행을 가자고 할 때는 일정이 안 된다며 늘 피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행을 간다니...


하지만 그다음 말이 이어졌다.


“수린이도 가고.”


그는 너무 자연스럽게 그 이름을 말했다.

마치 오래 함께 여행을 다녀온 사람처럼.


그 이름이 다시 나오는 순간 나는 잠깐 말을 잃었다.




옥수린.

나는 괜히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몇 명이서 가는데?”


“다섯 명 정도?”


그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 표정이 이상하게 마음을 더 건드렸다.


내 표정을 읽은 건지 그가 말했다.


"해마다 같이 여행을 다녔어. 이번에도 그렇게 가는 거야."


그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래도 이해가 힘들었다.

굳이 수린이와 함께 저렇게 여행을 가야 하나?


하지만 그 사람이기에 나는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같이 공연을 하는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은 전혀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여행이라는 단어보다

옥수린이라는 이름이 먼저 떠올랐다.


"여행 재미있게 다녀와요."


난 이 말 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삼킨 말들이 나를 조금씩 상처 입히고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아직 알지 못했다.


다만 그날 이후로 옥수린이라는 이름은 내 머릿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 일 이후로도 우리는 평소처럼 지냈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도 아무렇지 않게 연락을 했고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 답장을 보냈다.


우리는 여전히 책 이야기를 했고, 그의 공연에 대해 같이 얘기를 했다.

가끔은 그는 자기가 쓴 대본이라며 나에게 읽어봐 달라고도 했다.

나 또한 그에게 내 글을 보여주며 같이 글을 완성해 가고 있었다.

가끔은 화상 통화를 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일도 없는 관계였다.



그러다 몇 달 뒤.

그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나 다음 주에 여행 가.”


나는 잠깐 멈칫했다.


“또?”

“응. 무진 친구들이랑.”


나는 서운함이 밀려왔지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또 나와 여행은 가지 않는구나.'

서운했지만 그 말은 삼켰다.


그때 그가 덧붙였다.


“수린이도 같이 가.”


그 순간 내 마음이 완전히 내려앉았다.

나는 결국 서러움이 폭발을 했다. 화를 낼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화가 났다.


“왜 수린이랑 계속 같이 여행을 가?”


그는 조금 놀란 얼굴로 말했다.


“친구잖아. 작년에도 같이 갔었어.

내 친구들도 다 수린이를 알고.”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을 더 건드렸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소개할 때

"내 팬이에요."

혹은

"내 정신적 지주예요."라고 말했다.

한 번도 나를 여자친구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여자친구인 나를 두고 친구들 여행에 수린이를 데리고 간다는 게 나를 비참하게 했다.


'왜 나를 사람들에게 소개를 해 주지 않나?'

'내가 싱글맘인게 창피한건가?'


그런 생각이 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을 때,

나는 천천히 말했다.


“우리… 잠깐 시간을 갖자.”


그는 나를 바라봤다.


“왜?”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말로 꺼내는 순간 우리 사이에 있던 무언가가 완전히 무너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저 이렇게 말했다.


“그냥… 조금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그날 이후 우리의 시간은 잠시 멈추게 되었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전태일이 아니라 전태일과 옥수린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날 이후, 나는 한참동안 핸드폰을 들여다 봤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헤어져 있는 동안 우리는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나는 아직 여름에 머물러 있었고

그는 이미 겨울에 들어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신경 쓰이기 시작한 건

옥수린이 아니라

그녀의 이름을 말할 때 잠깐 애틋해지던 전태일의 표정이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9화제8화 내 남자의 여사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