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갖기로 한 뒤에도 우리는 완전히 멀어지지는 못했다.
시간을 갖자는 말을 한 건 나였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나는 그 말이 조금 후회되기 시작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사실 생각은 이미 끝났다.
나는 여전히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며칠 뒤 우리는 다시 만났다.
전태일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조심스럽게 나를 바라보기도 했고 괜히 농담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괜히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그날 이후 우리의 데이트는 조금씩 달라졌다.
예전에는 메신저와 화상 통화가 대부분이었다면 이제는 직접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날들이 늘어났다.
공연이 없는 날이면 그는 가볍게 만나자고 연락을 했고 나는 그 제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우리는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아무 목적 없이 거리를 걷기도 했다.
때로는 공연 이야기를 했고 때로는 내가 쓰고 있는 글 이야기를 했다.
어느 날 내가 말했다.
“오빠, 고흐 전시회를 한대. 그거 같이 보러 갈래?”
그는 그림을 잘 그렸다.
예전에 그가 그림을 몇 장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섬세한 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문득 같이 전시회를 가 보고 싶었다.
우리는 그날 처음으로 그의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데이트를 했다.
전시장 안에는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림 앞에 오래 서 있었다.
그는 한 작품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더니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그의 눈에 눈물이 살짝 고여있었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니 그는 그림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 봐. 이 그림 너무 먹먹하다.”
나는 그림보다 그림을 보는 그 사람의 얼굴을 더 오래 보고 있었다.
전시회를 나오면서 나는 괜히 그에게 말을 걸었다.
“오빠도 그림 잘 그리잖아. 나중에 내가 전시회 열어줄께.”
"꼭 열어줘. 내 전시회.”
그렇게 우린 쓸데없는 얘기를 하며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오빠는 왜 배우가 됐어?"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처음엔 그냥 무대가 좋았어.
근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 안에서 내가 살아 있는 느낌이 들더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 사실 작곡을 전공하고 싶었어.”
그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나를 봤다.
“그래서 음악 좋아하는 거구나.”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뒤 우리는 같이 오케스트라 콘서트를 보러 갔다.
내가 좋아하는 베토벤의 '황제' 협주곡과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제2번이 연주되는 날이었다.
그는 클래식 공연은 처음이라고 했다.
"나 졸면 어떡해?"
그가 긴장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나는 그 모습이 어린아이 같이 괜히 웃음이 났다.
"졸리면 그냥 자도 돼. 코만 안 골면 되지.
그냥 처음보는 클래식이니깐. 클래식을 듣는 것과 보는 거 느낌이 완전 달라."
그렇게 우리는 또 하나의 처음을 만들고 있었다.
그는 첫 번째 곡에서는 살짝 졸기도 했다.
하지만 뒤로 가면 갈수록 그는 점점 더 집중해서 음악을 들었다.
나는 그런 그와 무대를 번갈아 보며 생각했다.
그가 옆자리에 그가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도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어쩌면 우리 관계는 괜찮아질지도 모른다고.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