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우리 사이의 거리

by bookground

우리는 그 이후로 크게 싸우는 일은 없었다.

여전히 가끔 연락을 했고 시간이 맞는 날에는 서울에서 만나기도 했다.


예전처럼 책을 같이 읽기도 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각자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문장을 보여주기도 하고 어떤 장면이 좋았는지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런 시간은 여전히 좋았다.

그래서 나는 이 관계가 다시 안정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점점 더 바빠졌다.


전태일은 새로운 공연이 시작되었고 연습 시간도 늘어났다.

그는 종종 늦게까지 연습을 했고 가끔은 새벽에 집에 들어가기도 했다.

연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의 눈은 여전히 반짝였다.

나는 그 표정을 좋아했다.


나 또한 업무가 많아졌다. 출장은 줄었고 사무실에 있는 날이 많았다.

출장이라도 가면 서울에 가서 잠깐이라도 그를 볼 수 있을 텐데 그럴 수가 없었다.

기차로 가면 서울과 세림은 한 시간도 안 걸리는 거리여서 자주 출장을 서울로 가지만

그를 만나기 위해 가는 길은 멀게만 느껴졌다.


처음에는 그 거리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보고 싶으면 내가 서울로 올라가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가끔 그의 공연을 보러 갔다.


객석에 앉아 무대 위의 전태일을 바라보고 있으면 괜히 마음이 뿌듯해지기도 했다.

공연이 끝난 뒤 우리는 잠깐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극장 근처 카페에서 잠깐 차를 마시기도 했고

어떤 날은 그의 집에서 함께 밤을 보내기도 했다.


그와 함께 보내는 밤 때문에 나는 그가 여전히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와 보내는 밤은 늘 뜨거웠다.

처음에는 늘 가볍게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순간 말이 끊겼다.


그는 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내 손을 잡았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손이 내 어깨를 감싸 안았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쪽으로 몸을 기댔다.
그의 체온이 가까워질수록 숨이 조금씩 느려졌다.

그는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다가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짧은 키스였지만 그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손이 내 등을 따라 내려왔고 나는 그의 셔츠를 잡고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이 필요 없는 밤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우리가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잊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와 함께 보내는 밤이 우리가 아직 괜찮다는 증거라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늘 짧았다.

난 아침에 되면 서둘러 세림으로 내려가야 했고 그는 다시 연습실로 가야만 했다.


그에게는 다시 연습이 있었고 다시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만남은 조금씩 달라졌다.

함께 시간을 보내기보다 잠깐 얼굴을 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그와 조금 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지금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연습 이야기를 했고 새로운 작품 이야기를 했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번 작품 끝나면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이 말은 나는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는게 정확하다.

나는 그와 같이 보내는 시간을 갈구했고, 그는 성공을 갈구하고 있었다.


공연과 새로 쓴 작품들을 얘기할 때 그의 눈은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표정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의 서운함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또 다시 말을 삼켰다.

그리고 조용히 상처 받고 있었다.


하지만 삼킨 말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가슴 어딘가에 조금씩 쌓여 갔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점점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게 되었고
그는 그럴 때마다 말했다.


“그냥… 우리 흘러가는 대로 두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말은 마음에 닿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같은 시간을 지나가면서도 서로 다른 계절을 향해 걷고 있는 사람들처럼.


서울과 세림의 거리는 처음 만났을 때와 같았지만

우리 사이의 거리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사람 사이의 거리는 지도 위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 거리는 생각보다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서울과 세림의 거리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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