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같은 시간, 다른 계절

by bookground

우리는 여전히 가끔 만났다.

하지만 예전처럼 길게 이야기하는 시간은 아니었다.

대화는 짧아졌고 서로의 하루를 묻는 말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래도 우리는 아직 만나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그의 집에 있었다.

전태일은 샤워를 하러 들어갔고 나는 그의 방에 혼자 있었다.

집 안은 조용했다.


전태일은 늘 일기를 썼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게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었다.


그때 내 머리를 스치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나는 문득 그에게 물었다.


“오빠는 왜 나 좋아해?”


전태일은 잠깐 웃더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일기에도 적었는데.”


나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너 귀여워서.”


나는 웃었지만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래서였을까.

그날 문득 그 일기장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잠시 손을 뻗었다가 다시 멈췄다.

남의 일기를 보는 건 분명 잘못된 일이었다.

그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일기장을 펼쳤다.


처음에는 연습 이야기들이었다.

공연 이야기
대본 이야기
무대 이야기.

전태일다운 기록들이었다.




몇 페이지를 더 넘겼을 때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옥수린.

그리고 짧은 문장 하나.


나는 괜히 그 페이지의 날짜를 다시 확인했다.

내가 전태일이라는 배우를 알기 전이었다.

그래서 안심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 이름과 그 짧은 문장이 적혀 있는 것만으로도 어딘가 기분이 묘했다.


나는 그 페이지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넘겼다.


몇 장을 넘기다가 나는 손을 멈췄다.


오늘 정아를 처음 봤다.
생각보다 귀여웠다.


나는 잠깐 웃었다.

그 문장을 정말로 적어 놓았다는 것이 이상하게도 조금 기뻤다.


하지만 몇 장을 더 넘겼을 때 나는 다시 손을 멈췄다.

옥수린의 이름이 또 있었다.

나는 천천히 날짜를 확인했다.

그 날짜는 내가 전태일을 처음 만난 뒤였다.

하지만 내가 전태일을 남자로 좋아하기 이전인 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페이지를 한 장 더 넘겼다.

거기에도 그 이름이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 순간 여러 장면들이 천천히 연결되기 시작했다.

나와 옥수린의 첫만남.

여행 이야기.

전태일의 손이 끼어 있던 반지.

그리고 옥수린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보이는 전태일의 표정.


나는 천천히 일기장을 덮었다.

이걸 읽어버린 건 분명 잘못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일기를 통해 나의 의심이 확신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걸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더 오래 그를 좋아했을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전태일에게 말했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그는 잠깐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마 눈치 채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의 일기장을 본 걸.

하지만 나를 질책하지 않았다.


그리곤 그는 아무말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이상하게도 모든 대답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집을 나왔다.

밖은 아까와는 다른 계절의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옥수린의 이름이 적혀 있던 그 페이지들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일기 속의 전태일은 내가 알던 모습과 조금 달랐다.


그는 그 이름 앞에서 기뻐했고, 흔들렸고, 질투하기도 했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는 감정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몇 줄을 읽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에게 그녀가 얼마나 깊이 남아 있었는지를.


나는 그 순간 처음으로 알았다.


'아, 이 사람은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그 사랑의 온도가 나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나는 그에게 자주 보고 자주 연락하고 늘 같이 있고 싶어 했다. 나의 사랑의 방식은 그랬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늘 말했다. 그냥 흘러가는대로 두자고. 친구처럼 지내도 좋지 않냐고.


어쩌면 우리는 처음부터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같은 시간을 살고 있었지만 마음의 계절은 서로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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