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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원 May 22. 2020

쌀국수와 피카츄와 히레까스 사이

소울푸드 패러다임의 대전환

연남동 '독립카츠' 덜 익힌 돈까스의 매력을 즐길 수 있다.


그날을 기억한다. 입천장이 다 까졌던 그날. 스물한 살 때였다. 대학 입학 후 의정부 시골쥐를 벗어나고자 그 흔한 카페 알바를 곧 죽어도 광화문에서 하겠다는 고집을 부린 지 꼭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그래 봤자 고작 30만 원쯤이었던 알바비를 쥐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1층 화장품 코너에서 랑콤 아이크림과 맥 립스틱을 하나씩 포장하니, 수중에 남은 돈은 15만 원 남짓이었다. 내 선물은 살 수 없다는 허탈함에 허기가 몰려왔고, 그 길로 9층으로 올라갔다. 한 달간 열심히 알바를 했으니 지하 1층 푸드코트가 아닌 9층 식당가로 가도 되겠지 싶었다. 셀프서비스 말고 자리로 음식을 가져다주는 9층 식당가.


고소한 기름 냄새에 이끌려 들어간 곳은 ‘사보텐’이었다. 메뉴엔 내가 모르는 일본어가 수도 없이 쓰여 있었다. 난 그날 처음 알았다. 돈까스도 부위를 고를 수 있다는 사실을. 등심과 안심 중 천 원이 더 비싼 등심을 골랐더니, 작은 절구에 참깨를 담아주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하나같이 깨를 갈고 있었다. 나도 갈았다. 그리고 얌전히 양배추 샐러드를 먹고 있으면 등심 돈까스가 나왔다. 황금빛 튀김옷으로 둘러싸인 돈까스는 지금까지 내가 봐 온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균일하지 않은 크기의 빵가루는 촉촉해 보였다. 비싼 돈까스의 촉촉함은 ‘습식 빵가루’ 덕분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잘 튀겨진 습식 빵가루는 입천장을 할퀴었지만, 처음 맛본 그 맛에 중독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간 내가 겪어온 돈까스는 얇디얇은 종잇장 같았다. 생일날 엄마가 데리고 갔던 경양식집 ‘에반’에서도 얇은 돈까스를 팔았었다. 캔 옥수수 샐러드와 돼지고기를 얇게 펴서 튀긴 돈까스, 데미글라스 소스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인 줄 알았다. 그리고 급식에서 나오던 동그란 미니 돈까스는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조금 촉촉하라고 같이 주던 케첩이 돈까스를 더 맛없게 만들었다. 또 분식집에서 먹었던 피카츄 돈까스까지, 내가 알던 돈까스는 이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렇게 고소한 돈까스라니! 건식 빵가루의 얇은 돈까스가 아닌 두툼한 로스까스에는 치즈도 추가하고 심지어 명란도 올릴 수 있었다. 의정부 시골쥐가 가진 돈까스 패러다임의 대전환이었다.


두툼한 돈까스는 여전히 내 마음속 1등 음식이다. 난 서울 시내의 맛있는 돈까스집 투어를 한다. 다만 누군가 소울푸드가 무엇이냐 물으면 속내를 모두 오픈하지는 않는다. 30대 미혼 여성의 소울푸드가 돈까스인 것은 어쩐지 좀 쑥스러우니까. 그래서 대외적인 나의 소울푸드는 쌀국수다. 살도 좀 덜 찔 것 같고, 야채가 많으며, 먹을 때 추한 꼴을 보이지 않는 음식. 하지만 속내를 모두 공유하는 친구들은 알고 있다. 내가 의정부 신세계백화점 사보텐의 거의 모든 메뉴를 섭렵했으며, 서울시 자치구별로 돈까스 맛집 리스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오늘도 돈까스 그 미지의 세계를 탐험한다. 입천장이 모두 다 까지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내 사랑 돈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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