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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원 May 22. 2020

나는 기억한다. 그의 위로를.

김수영의 '봄밤'

시인 김수영, 사진을 뚫고 나오는 그의 기운....... 벌써 쫄았다.


지구에 빙하기가 찾아왔다. 체온은 점점 떨어져 가고 몸이 떨려온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가지고 있는 책을 불태워야 한다. 첫 번째 불쏘시개는 두껍고 불에 잘 타는 전공책이 될 것이다. 이어서는 의미 없는 사랑소설을 불태울 것 같다. 하지만 떨어지는 체온과도 바꿀 수 없는 최후의 불쏘시개를 고르라면, 난 김수영의 시집을 선택할 것이다.


서른 한 해를 살아가며 단 한순간도 다른 사람보다 빨랐던 적이 없다. 학교에 적응하는 것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땐, 남자 담임선생님이 무섭고 싫다고 등교를 거부하기도 했다. 다른 학교에 또 적응하는 것도 힘이 들겠다 싶었는지 엄마는 3월 한 달간 나를 어르고 달래 학교에 보냈다. 그렇게 간신히 적응할 때쯤이면 다시 새 학기가 됐다. 내게 학창 시절 12년은 늘 적응의 순간들이었다.


성인이 돼서도 마찬가지였다. 남들은 한 번에 가는 대학도 두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갔다. 학교에서는 딱 나와 비슷한 친구 한 명과 조용히 다녔고, 수업이 끝나면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시간을 죽였다. 그 와중에 정의를 찾는 기자가 되겠다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하지만 결국 기자가 되지 못했다. 또 시간만 죽인 셈이었다. 조금 이른 친구들은 벌써 대리님이 되었을 스물여덟, 난 그제야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왜 넌 항상 느리냐고, 다른 친구들을 보며 조바심이 들지 않냐는 주변 어른들의 질문을 맞닥뜨릴 때마다 멋쩍게 웃어넘겼다. 그렇다고 속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왜 나는 앞서 나가지 못할까, 왜 늘 남의 뒤꽁무니만 뒤쫓아갈까 스스로 하는 원망으로 마음이 가득 찼을 때쯤, 김수영의 시를 만났다. 시의 위로를 통해 나만의 속도를 지키자고 간신히 마음을 동여맸다. 그리고 스스로를 자책할 때마다 김수영의 시를 기억해낸다. 혹시나 조바심이 들어 스스로를 원망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김수영의 위로, 봄밤을 전한다.


한 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 오오 인생이여 


*고수리 작가의 블로그에 게재된 저의 글입니다. (URL : https://brunch.co.kr/@daljasee/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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