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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남하이 김대표 Feb 02. 2020

내 인생에 '다름'이 들어온 날

장애인식개선 에세이

  11살 철없는 초등학생 어린이었다. 그저 친구들과 놀기를 좋아했던 키 작은 꼬마 아이. 그 날도 바쁜 부모님을 졸라 함께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에 가기로 했다. 신도림에서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정신없이 신나하며 창밖을 바라보던 내 귀에 탁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소리의 출발점으로 눈을 돌리니 눈에 들어온 건 좁은 지하철 통로를 한걸음 씩 다가오는 흰 지팡이였다. 그 흰 지팡이의 위에는 주름진 손이 있었고, 더 위로 올라가니 선글라스를 쓴 한 할아버지가 흰 지팡이에 자신의 몸을 의지한 채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엄마. 저 분은 왜 지팡이를 짚고 다니셔?” 호기심 가득할 나이의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 분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장애인이라는 존재가 내 삶에 처음으로 들어왔다.


  이후 중학교에 올라가기 전 난 노량진으로 단과학원을 다니게 되었고, 1주일에 두 세 번은 1호선을 탔다. 그리고 1호선을 탈 때마다 그 분이 종종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의 마음이었다. ‘앞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다니지?’, ‘왜 흰 지팡이로 앞을 탁탁 치면서 다닐까?’, ‘왜 지하철을 다니면서 동냥을 하시지?’ 등 다양한 궁금증들이 지하철의 진동과 함께 내 온 몸을 맴돌았다.


  그 다음의 감정은 동정이었다. 세상을 볼 수 없어서 불쌍하다는 하찮은 동정에, 그 할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 동냥밖에 없을 수도 있겠다는 건방진 착각에 할아버지가 내 앞을 지나갈 때 마다 과자 사먹을 돈을 할아버지에게 드리곤 했다.


  그러다가 문득 할아버지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발견했다. 여전히 무지했던 나는 의심부터 들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할아버지가 어떻게 시계를 보지?’라는 의심은 지하철역을 출발하며 점점 커지는 지하철 소리처럼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 의심은 종착지 없이 점점 불어만 갔다. 결국 나는 그 할아버지가 시각장애인을 빙자한 사기꾼이라고 단정 짓고 말았다. 눈이 보이지 않는 할아버지가 어떻게 그렇게 잘 걸어 다닐 수 있는지 에서 시작된 호기심은 동정의 터널을 지나 곧 의심의 도로에 올라탔고, 손목에 찬 시계는 출루한 의심을 확신이라는 홈으로 불러들이기에 충분한 적시타였다.


  그 때부터 그 시각장애인 할아버지는 나에게 범죄자였고, 사기꾼이었다. 학교에 가서 내가 발견한 사실 아닌 사실을 친구들에게 미주알고주알 던져놓았고, 1호선을 타면 그 할아버지를 눈여겨보라고 앞장서서 말하기도 했으며, 그 할아버지에게 적선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저 할아버지의 손목에 있는 시계를 보라고, 저 할아버지는 시각장애인을 빙자한 사기꾼일 거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그 시계가 음성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시각장애인용 음성시계라는 걸 안 건 무려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렇게 난 20년의 시간동안 그 할아버지를 사기꾼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니, 그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시각장애인 전체를 바라보는 시선조차 곱지 않았고, 뉴스에서 장애인 부정수급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통쾌해했으며, 시각장애인은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의심이 많다는 등의 낭설을 사실처럼 받아들였었다.


  내 삶에서 장애는 소설 삼체 속 윈톈밍이 청신에게 선물한 별 DX3906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이야기였다. 친구 중에도 장애를 가진 이는 없었고, 다녔던 학교에도 특수학급은 없었으며, 어머니의 사촌동생인 청각장애인 삼촌은 지금까지 본 횟수를 연평균으로 따지면 0.5번은 될까 말까한 먼 사이였다. 장애는 속된 말로 남이야기였고, 장애는 어린 나에게 동정의 대상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내가 장애를 갖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다 생각했던 굉장히 오만하고, 철없던 아이었다. 대학생이 되어도, 군대를 제대해도, 대학교를 졸업해서 30이라는 숫자가 20이라는 숫자보다 더 가까워졌을 때가 되어도, 심지어 아나운서 준비를 위해 점자도서관에서 낭독봉사를 할 때조차도 장애 인식에 있어서 나는 세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에 불과했다.      


  31살 철없는 사회초년생 ‘어른이’였다. 여전히 친구들과 놀기를 좋아했던 여전히 키 작은 어른아이. 아나운서 준비를 열심히 하면서 이곳저곳 나라는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니던 그 시절 난 ‘훈훈한 그 남자의 하루 이야기 – 훈남하이’라는 이름의 라디오 팟캐스트 방송을 반은 취미처럼 반은 일처럼 하고 있었다. 그 날도 쓸데없이 바빴던 나는 상암에 있는 디지털미디어시티에 약속이 있었다. 같이 아나운서 스터디를 했던 한 동료(앞으로 MK로 칭하기로 한다)의 주선으로 국내 첫 장애인 앵커로 활동하고 있던 이창훈 아나운서를 만나는 날. 그 주선은 나의 요청이 아니라 그의 요청이었고, 새로운 일거리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11월 중순 싸늘한 바람이 가득한 빌딩숲을 대차게 걸어갔다.


  한국영상자료원이라는 낯선 곳에서 진행되는 배리어프리영화제가 약속장소였다. 배리어프리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고, 심지어 라임을 맞춘다고 배리, 어프리 이런 식으로 잘못 잘라 읽기도 했던 그 곳에 도착한 순간 날 맞이한 건 포스터와 현수막에 인쇄된 ‘Barrier-free’라는 글자였다. 소위 명문대 영문과 출신이라고 으쓱했던 나날들이 살짝 창피했던 순간이었다. 그랬다. 배리어프리 영화제는 ‘장애와 상관없이 모두 다 함께 즐기는 영화축제’라는 슬로건으로 2011년부터 시작된 영화제였고, 난 역시 무지했다. 이창훈 아나운서는 그 날 영화제의 사회를 보기로 되어 있었고, 그 영화제가 끝난 뒤 주선자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그리고 다시 장애라는 키워드가 내 삶에 스며들고 있었다.


  영화제가 끝나고 이창훈 아나운서와 만났다. 수트를 입고 무대에서 내려온 그는 생각보다 굉장히 멋있었다. ‘생각보다’라는 표현에서 이미 내가 그 전에 갖고 있던 편견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아 부끄럽지만, 내가 20년 전 지하철에서 시각장애인 할아버지의 동냥을 봤을 때 부터 지금까지 갖고 있던 장애에 대한 편견을 처음으로 시원하게 깨준 사람이었다. 어색하지만 반갑게 악수를 한 뒤 난 어쩔 줄 몰라 했다. 나의 무지가 그에게 실례가 될까봐, 나의 어설픈 배려가 그에게 불쾌감을 줄까봐 난 주선해준 MK뒤로 계속 뒷걸음질 쳤다. 그 때까지 장애인과 1분 이상 대화조차 한 적 없는 나에게 그 시각부터 이어진 몇 시간은 산업혁명만큼이나 내 인생에 큰 대전환의 순간이었다.  


  함께 밥을 먹으러 인근의 베트남 식당으로 갔다. 걸음을 내디딘 순간부터 난 세 살 아기가 세상을 배워가듯 가득 찬 호기심으로 내가 무지했던 장애라는 세상에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시각장애인 안내보행이 그 시작이었다. 팔꿈치를 살짝 내어주는 것으로 안내보행은 시작되었다. 이창훈 아나운서는 MK의 팔꿈치를 살며시 잡았고, 우리는 조금씩 서로의 어색함을 깨는 대화를 하며 가까워져갔다. 알고 보니 이창훈 아나운서와는 나이도 같았고, 직종도 비슷해 보다 친해질 수 있었다.


  베트남 식당에서도 교육 아닌 교육은 계속됐다. 그들은 일상이겠지만 나에겐 스스로의 교육이었고, 습자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하나하나 배워갔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이창훈 아나운서의 손에 젓가락을 쥐어주고 그 손을 잡아 앞에 있는 반찬 쪽에 하나하나 짚어주며 ‘이건 단무지이고, 이건 소스야’ 설명을 해주는 MK의 모습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이창훈 아나운서의 장애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그냥 그 친구가 갖고 있는 특징이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들었다. 마치 지하철에서 힘들어하는 노인의 무거운 짐을 들어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지나친 배려도 특이한 시선도 필요 없는 그냥 그의 신체적 특징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깨달았다. 음식이 나오고 그 음식을 그 앞에 덜어주고 함께 맛있는 식사를 하는 그 순간 난 내 속에서 장애라는 존재를 옭아매고 있던 밧줄을 조금씩 끊어가고 있었다.


  한참의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점점 이창훈 아나운서가 갖고 있는 시각 장애를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다. 교과서가 왜 그 모양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덕 교과서에서 나오는 것처럼 배려해줘야 하는 존재, 도와줘야 하는 존재로만 여겨졌던 장애인이 나와 다르지 않음을 은연중에 받아들였다.


  문득 20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지하철 1호선의 시각장애인 할아버지. 조심스레 물어봤다. 시각장애인이 손목시계를 차는 건 어떤 의미냐고 말이다. 그가 말했다. 시계를 ‘듣기’ 위함이에요. 아차 싶었다. 20년 전 그 할아버지가 차고 있던 시계는 시계를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만들어진 음성시계였던 것이다. 난 20년 전 몇 년은 강하게, 그리고 그 이후에도 옅지만 여전히 그 할아버지를 의심하고 있었고, 순간 미안함과 죄책감에 얼굴이 벌겋게 됨을 느꼈다. 그 마음을 괜히 들키기 싫어 찬 물을 벌컥 들이켰다.


  그는 나에게 앞으로 좋은 콘텐츠를 같이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콘텐츠는 우리 둘의 공통 관심사인 야구일 가능성이 컸다. 조만간 함께 재밌는 일을 할 생각을 하니 괜히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식사를 마친 후 역으로 가기 위해 나왔다. 바람이 굉장히 찼고, 광장에 흩날려있던 낙엽들이 거센 바람에 작은 회오리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창훈 아나운서와 MK에게 말했다. “내가 창훈씨를 안내보행해도 될까요?” 둘 다 흔쾌히 응했다. 이창훈 아나운서가 내 오른쪽 팔꿈치에 손을 댔다. 일순 차가운 기운이 사라지고 괜히 따뜻해졌다.


  디지털미디어시티역에 도착해서 방향을 물어보니 나와 MK는 합정역으로 가기 위해 봉화산행을, 이창훈 아나운서는 정반대인 연신내행을 타야했다. ‘역 플랫폼까지 같이 가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던 찰나 그는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바로 흰 지팡이였다. 시각장애인의 필수품인 흰 지팡이. 지팡이를 펼친 그는 ‘다음에 봬요’라는 다정한 말을 던진 채 바닥에 깔린 점자보도블록을 따라 연신내 방면 플랫폼을 향해 갔다. 탁탁거리는 흰 지팡이 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하지만 내 오른쪽 팔꿈치에 여전히 느껴지는 이창훈 아나운서의 따뜻한 손의 흔적과 함께 그 소리는 내 마음을 계속해서 울렸다. 난 처음으로 장애인인 친구가 생겼고, 그건 사실 특별한 일이 아니었으며, 20년 전 가졌던 장애에 대한 인식이 방향을 틀어 서서히 전환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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