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훈남하이 김대표 Feb 05. 2020

동정과 배려 사이

장애인식개선 에세이

  이창훈 아나운서가 창훈이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관계의 발전은 때로 말을 놓음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동갑내기임에도 이상하게 이창훈 아나운서에게 말을 놓기는 쉽지 않았다. 관계의 시작점이 일이었고, 자주 봤지만 그 만남의 불씨 역시 일이어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는 핑계를 댈 수 있을까? 아니면 나도 모르게 ‘어떤’ 조심성이 발동해서였을까? 어쨌든 이창훈 아나운서와 함께 한 지 5년이 다 되었지만 그가 나에게 창훈이가 된 건 불과 5개월도 채 되지 않았다.


  2015년부터 창훈이와 ‘주간야구 왜’라는 라디오 팟캐스트를 함께 진행했다. 녹음은 주로 그의 집에서 진행이 되었으며, ‘주간야구 왜’라는 타이틀처럼 매주 방송이 나갔기 때문에 거의 매주 한 번은 그의 집에 갔다. 야구의 비시즌 기간은 빼더라도 일 년에 그의 집을 마흔 번은 갔으며, 2019년 중순까지 4년 반을 진행했으니, 단순 계산으로 이백 번 가까이 그의 집을 방문했다. 우스갯소리로 최근 5년간 창훈이의 집을 가장 많이 방문한 사람 1위가 나라고 나는 그랬고, 너라고 창훈이는 그랬다. 우스갯소리라기엔 너무 사실이었다. 또 2019년 하반기에는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장애인식개선교육 더좋은콘서트 유아스페셜’을 알리기 위해 함께 전국 교육청을 상대로 소위 영업이란 것을 다녔다. 전국을 다 창훈이와 다닌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주, 부산 등을 포함해 굉장히 많은 지역을 함께 했다. 때론 당일치기, 때론 1박2일, 때론 2박3일, 그와 함께 한 시간은 점점 많아졌고, 우린 서로 말을 놓으며 비즈니스 파트너에서 친구로 거듭났다.


  창훈이와의 관계를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창훈이와 함께 하며 느낀 장애에 대한 인식이 순간 갑작스럽게 형성된 것이 아니며, 천천히, 지속적으로, 그리고 밀도 있게 형성되었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이다. 창훈이를 알기 전과 창훈이를 알고 나서 장애에 대한 많은 부분에서 인식이 전환됐지만, 그 중 가장 크게 인식이 전환된 곳은 나라는 인간과 창훈이라는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창훈이와 나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 창훈이의 집에 갔을 때였다. 현관문을 열어준 것도, 나를 방으로 안내한 것도, 나에게 음료를 갖다 준 것도, 심지어 방송을 위해 컴퓨터를 조작한 것도 모두 창훈이었다. 장애에 대한 인식이 전무했던 나에게 창훈이가 보여준 모든 행동들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시각장애인인 창훈이가 그 모든 행동을 자연스럽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을까 라는 생각은 창훈이의 몸에 나있는 상처들에 점점이 박혔고, 그 때 처음 느낀 생각은 안타깝게도 놀라움으로 치장된 동정이었다. 창훈이의 집에 처음 발을 디딘 나는 창훈이를 불쌍하게 보고 있었고, 그가 보여준 당시의 나에게 놀라운 행동들을 보고 난 ‘생각보다 꽤 많은 것들을 혼자서 할 수 있구나’정도의 불완전한 인식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심지어 ‘생각보다’라는 단어도 사실은 나와 그를 다르게 보는, 편견에 가득 찬 시각을 그대로 투영한 단어에 불과했다. 창훈이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한동안 동정의 마음이 지배하는 세상이었고, 그 세상이 무너지기까지는 꽤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동정으로 만든 성벽은 창훈이와의 관계가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서서히, 밀도 있고, 강력하게 무너져갔다. 내가 미처 인식이 전환되고 있다는 걸 인식하기도 전에 말이다. 


  장애인식의 전환점으로 방향을 튼 시기가 언제인지를 묻는 질문엔 쉽게 답할 수 있다. 당연히 이창훈 아나운서로서 창훈이를 처음 만난 순간이다. 하지만 언제 동정의 성벽이 완전히 무너졌는지, 즉 창훈이를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그냥 나와 함께 이 힘들고 즐거운 세상을 살아가는 동갑내기 친구로 인식이 확고하게 전환된 건 언제냐는 질문엔 쉽게 답할 수가 없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그 성벽은 천천히, 내밀하게, 지속적으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다만 어느 순간 창훈이가 불쌍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동정의 대상으로 보이지 않았으며, 그는 무조건적으로 도와줘야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약간의 배려 정도만 보여주면 되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창훈이말고 세상의 모든 장애인들이 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삼십 여 년 이상 완고히 지키고 있던 성벽을 무너뜨린 건 그와 함께 한 모든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창훈이와 함께 한 시간이 점점 쌓여갈수록 그 성벽은 내가 눈치 채지 못하게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나에겐 창훈이와 함께 한 시간이 장애인식개선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지금은 창훈이가 시각장애인이라는 걸 가끔 까먹고 말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차를 타고 같이 이동을 하다가 창훈이에게 “옆에 간판 봐봐”라고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창훈이는 그런다. “내가 그걸 어떻게 봐.” 그리고 서로 웃는다. 창훈이는 나에게 더 이상 동정을 해야 할 장애인이 아니라 그냥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일 뿐이다. 눈이 큰 친구, 눈이 작은 친구, 시력이 좋은 친구, 시력이 좋지 않은 친구처럼 말이다. 그렇게 난 처음 그를 보고 가졌을 그 ‘어떤’ 조심성도 모두 체화되어버려 연못 위 연꽃처럼 부동심으로 그를 인식하고 있었다.  


  장애는 장애인이 극복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그냥 장애를 가진 사람의 정체성이라는 말. 이 말은 현재 나와 창훈이, 그리고 이 책을 같이 쓰고 있는 이현학 대표가 함께 하고 있는 장애인식개선사업의 주 메시지 중 하나이다. 내가 창훈이를 통해 눈이 보이지 않는 게 눈이 큰 것, 눈이 작은 것 등과 동등한 규모의 정체성으로 인식하게 된 것처럼 모든 장애는 그냥 장애인이 가지고 있는 그들의 정체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으로 인식이 전환될 수 있게 하는 게 목표이다. 그렇게 되면 인식이 전환되고 개선된 비장애인들이 더 이상 장애인들을 동정의 시각으로 보지 않게 되고 그들에게 필요한 건 단지 약간의 배려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시각적 요소가 필요한 부분에 있어서 배려를 해주면 되고, 청각장애인들에게는 청각적 요소가 필요한 부분에 있어서 배려를 해주면 되는 것이며, 지체장애인들에게는 이동에 있어서 배려를 해주면 되는 것이다. 다른 유형의 장애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무거운 짐을 들고 있는 할머니를 도와 그 짐을 대신 들고 지하철 계단을 올랐을 때 그 할머니를 동정의 시각으로 보고 돕지는 않는다.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올라가기 힘드니까 약간의 배려를 해드릴 뿐이다. 장애 역시 그와 전혀 다르지 않다. 장애인에게 필요한 건 동정이 아니라 약간의 배려이다.    


  이렇게 인식이 전환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다행히 주변에 창훈이를 포함한 장애를 가진 지인들이 많았고, 그들과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었기에 난 별다른 장애인식개선교육없이 인식이 전환되고 개선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비장애인들은 장애인과 만날 기회가 많지 않고, 그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하기는 사실상 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비장애인들이 장애를 낯설어하고, 장애인을 자신과 다른 존재로 여기며, 심지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정치인들은 장애인을 치켜세우기 위해 장애인을 폄하하는 모순적 발언을 서슴지 않고 하기도 한다. 또한 장애인을 위해야 한다고 말하며 장애에 대한 인식이 전무한 사람들이 고안한 기술들이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장애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고 개선해야 한다. 그게 바로 우리가 진행하는 장애인식개선사업이 필요한 이유이다.   

작가의 이전글 내 인생에 '다름'이 들어온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