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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거스트 Jul 24. 2023

영어 프레젠테이션 울렁증 극복기

 

 지금부터 약 1년 전인 2022년 7월. 유럽의 가장 큰 전자 유통사인 미디어마트 MediaMarkt 와의 T2T 미팅*에 초대받았다. (*top to top 미팅: 양사의 고위 경영진이 만나서 비즈니스 전략과 성과를 논의하는 회의 자리)

 당시 나는 우리 회사에서 가장 큰 사업부의 글로벌 비즈니스 디벨롭먼트 헤드(Head of Business Development)로 일하고 있을 때라, 전 세계의 주요 고객사와 관계를 맺고 성장 전략을 협의하는 것이 내 업무 중 일부였다.

 COVID 19 이전에는 주요 고객사를 본사인 암스테르담에 초대해서 릴레이 만남을 가지는 것이 연례행사였지만, COVID 19 동안 모든 행사가 온라인으로 대체되거나 취소되는 바람에 이런 행사가 정말 오랜만이었다. 유럽의 중요한 고객사이니, 유럽 지역 본부의 경영진도 총 출동했다.

 우리 회사의 R&D 혁신 센터에서 1박 2일간 진행된 그 행사에서 나는 프레젠테이션을 말아먹었다.


 세 가지 주요 제품군의 혁신적인 신제품을 소개하는 자리였는데, 팀에서 미리 만들어준 50여 장의 슬라이드를 넘기는 동안 미디어마트의 임원들은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정보와 너무 후진 나의 영어 때문이었을까. 당황한 우리 회사의 유럽 사장과 임원들이 내 프레젠테이션 여기저기에 끼어들기 시작했고 내 발표는 완전히 길을 잃어버렸다.

 행사를 마친 후 리뷰 미팅에서 유럽 사장은 말이 없었고, 유럽 영업 헤드는 화를 꽉 눌러 참고서 나에게 이런저런 피드백을 주기 바빴다. 시간 관리가 안되었고, 중요한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기 못했고 등등.



 

 그 악몽 같던 기억이 가물해질 무렵 일 년이 지나서 다시 T2T의 시즌이 왔다. 이번에는 아마존 Amazon. 나는 새로 맡은 사업부의 카테고리 글로벌 헤드로 참석했다. 같은 미팅 장소, 비슷한 참석자 (유럽 사장 포함), 그리고 비슷한 회의 주제. 1년 전의 트라우마가 스멀스멀 살아나는 듯했다.


 40여 분간의 프레젠테이션과 질의응답을 마치고 다음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휴식 시간 동안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프레젠테이션 너무 좋았어. 특히 그 유럽 법규 변경내용이랑 중국 관련 부분은 완전히 킬링 포인트였어!" (유럽 사장). "너무 잘했어요. 저쪽에서 우리 기술력과 품질에 대해서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깜짝 놀랐다네요. (나의 보스). "굳 잡!" (동료 임원) 등등.

 지난번 나의 망신을 고스란히 목격했던 마리아 (유럽 사장)는 점심시간에 나를 또 찾아왔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지난번 미디어마트 때랑은 완전히 다르던데? 내용도 좋았지만 너만의 스타일로 진행한 게 너무 멋졌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사실 별일 없었다. 1년 전의 굴욕을 만회하기 위해 칼을 갈고, 프레젠테이션의 고수에게 가르침을 받고 하는 등의 드라마틱한 일은 없었다. 대신 하루하루 일상을 살면서, 크고 작은 프레젠테이션들을 계속 시도해 보면서 배우고 느낀 대로 작은 것들을 고쳐나갔다.

 세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겠다.



 첫째, 템플릿 뛰어넘기 (하고 싶은 말을 할 것)

 회사의 고위 경영진들과 여러 사업부가 공동 참여하는 주요 고객사 프레젠테이션에는 대규모 팀이 붙는다. 누군가는 슬라이드의 형식을 잡고, 사업부 간 공통된 흐름을 정하고, 누군가는 전체 준비 과정을 진두지휘하면서 멋진 슬라이드와 영상물로 만들어진 대용량 파일을 제작한다.

 나는 D-day 6주 전 브리핑 미팅에서 내가 말할 중요 포인트를 준비팀에 알려주었고, D-day 2주 전에 내 발표 부분 슬라이드 40여 장을 전달받았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용이 안드로메다에 가 있었다. '멋있게', '각 사업부의 내용을 일관적 흐름으로' 만들려는 준비 팀의 의욕이 콘텐츠, 내용을 압도해 버렸다.

 나는 열심히 준비해 준 팀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후 4주 전 브리핑 내용으로 '다시 준비'할 것을 요청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직원들에게 미안했지만, 그 멋진 슬라이드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

 D-day 1주 전에 홍콩과 중국 출장에서 돌아와 보니,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나의 내용'으로 급히 수정된 슬라이드가 만들어져 있었다. 준비팀은 나의 출장 동안 몇 차례의 이메일과 MS 메시지로 나의 탈선에 대한 그들의 염려를 알려왔다. So what? (어쩌라고요?) 나는 애써주어 고맙다는 말만 남겼다.

 돌아와서도 이틀 동안은 외부 워크숍에 참석해야 해서 D-day 하루 전에야 피곤에 절은 상태로 나의 슬라이드와 마주했다.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고, 그 악몽 같던 회의장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내 모습을 떠올렸다. 불필요한 텍스트를 반 이상 날리고, 강조할 부분과 가볍게 넘어갈 부분으로 흐름을 잡고 나니 40여 장이 20장으로 줄었다. Okay, ready to go.  

 

둘째, 큐레이션 (내용 전달자가 아닌 안내자가 되기)

 이건 회사 경력이 나보다 10년쯤 앞서 있던 스코틀랜드 출신 동료 더글라스 Douglas로부터 배웠다. 사업부의 재무 담당이었던 더글라스는 매달 최고경영진에게 하는 사업부 성과 보고 회의를 주관했다. 매번 그는 숫자로 빽빽이 채워진 성과 보고를 디즈니 애니메이션처럼 재미있게 만드는 마법을 부리곤 했다.

 비결은 큐레이션. 그는 보고를 시작할 때 운을 띄운다. "오늘은 정말 엄청나게 훌륭한 내용을 들으실 겁니다. Today, we have some excellent points to share." 그의 말에 모두들 눈이 반짝반짝해진다. (사실 월간 재무 보고에 뭐 그리 대단한 내용이 있었겠는가.)

 어떤 내용은 그의 한마디로 하찮아지고, "이건 숫자가 빨간색 (성과 미달)이지만 그렇게 중요한 내용은 아니에요. This looks bad, but it's not that important.", 그의 한마디에 작은 성공이 모두의 커다란 성공이 되기도 했다. "이건 꼭 주목하셔야 합니다! 정말 대단해요. 한번 제대로 들여다봅시다. This is really important. Really great. Let's get into it deeper."

 

D-day 하루 전에야 슬라이드를 완성한 탓에 나에게 주어진 발표 준비 시간은 미팅 장소로 이동하는 2시간의 운전 시간이 전부였다. 그때 더글라스의 매직을 떠올렸다. 그리고 나의 순서.

 "(아마존) 여러분과 저희들은 정말로 근사한 비즈니스를 함께 하고 있죠. 제가 왜 그런지 알려드릴게요. This is great that we are in this beautiful business together. Let me tell you more."

 "유럽시장의 법규가 바뀌고 있어요. 이건 우리도 잘 알아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마존에게 매우 중요한 내용이에요. The European law is changing. This is absolutely critical for Amazon to be well aware of and ready for, even more than us."  

 "어제 저녁 식사에서 이런 이야기가 오갔다고 들었어요. 우린 완전히 통했어요. 왜냐하면요.. I heard that you discussed...... last dinner. We are so connected. We have the same goal. Because..."

  

 셋째, 질문을 집중해서 끝까지 듣기 

 질의응답은 영어 발표 울렁증에 더해서 오랫동안 나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누군가가 내 발표에 질문을 하면, 특히 그 사람의 지위가 높을수록 나의 뇌는 순식간에 백지장이 되어버리곤 했다. 당황해서 주변을 돌아보면 질문의 내용을 요약해서 다시 알려주는 조력자가 나타나곤 했지만, 그때마다 내가 너무 초라하고 부끄러웠다.

 작은 변화의 시작은 온라인 영어 수업인 Cambly의 선생님으로부터 왔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영어 수업을 듣는다. 영어는 평생 숙제.) 선생님은 간단한 처방을 주셨다. 요약하면 세 단계 정도.

 첫째, 질문을 끝까지 '그냥' 듣기만 할 것. 이때 미소를 짓고 있으면 더 좋다.

 이 처방은 질문이 시작됨과 동시에 답변을 준비하고 있는 내 습관을 고쳐주었다. 질문이 나오는 동안 답변을 준비한다는 건 사실 딴생각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결과는? 상대방의 긴 질문이 끝나고 나면 멍-한 백지장.

 이 습관을 고치기 위해서 나는 속으로 질문 따라 하기를 연습했다. 질문에만 집중하기 위해 상대말을 마음 속으로 쉐도잉 shadowing 하는 것이다. 효과가 좋았다.

 둘째, 질문이 끝나면 상대방을 칭찬하고, 질문을 요약 확인하기.

 "정말 좋은 질문이에요."라고 인사하면서 긴장을 풀고, 질문이 길게 이어졌을 경우 열심히 경청한 질문의 핵심을 다시 상기시키면서 상대방과 교감하기. 이 두 가지를 하는 동안 뇌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답변이 떠오르게 된다.

 마지막인 세 번째는 답을 모를 때에도 여유를 잃지 않기.

 "그건 제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네요. 질문해 주어서 고마워요. 팀과 확인해 보고 꼭 다시 알려드릴게요." 또는 "공식적인 입장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건 이런 쪽이에요. 팀과 의논한 후에 공식적인 답변을 알려드릴게요."

 핵심은 첫 번째 단계인 "질문 듣기"이다. 너무 상식적이고 당연하게 보일 수 있지만  "항상 정답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혀있던 나에게는 가만히 듣고만 있는 게 몹시 어려웠다.  

 


 

 우리나라 말의 달변가일수록 영어 프레젠테이션의 스트레스와 고통이 더 큰 것 같다. 스스로 정한 기준이 높고, 청중과 교감하는 짜릿한 기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게 잘 안되었을 때의 좌절감이 더 무겁다.


 한국에서 일하는 동안 대중 프레젠테이션은 나를 빛나게 해주는 무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영어권으로 옮겨온 후, 내가 가장 잘하던 것을 가장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나니, 속상하고 당황스러움을 넘어 영어 발표나 회의 자리가 무섭기까지 했었다.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이런저런 연습을 해보고, 진심으로 조언해 주는 분들의 도움 덕분에 이제는 영어 발표나 회의 자리가 많이 편해졌다.

 비슷한 경험을 하고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이 글이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모두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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