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로 떠나는 유럽여행

다섯 번째 여행- 스페인/ 바르셀로나 2

by 소심한 삘릴리

올라(Hola)~ 바르셀로나 2


성당 광장에선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로마 시대 흔적들이 잘 보존된 노바 광장에서 만난 오래된 공예품과 기념품은 환상의 커플처럼 잘 어울렸다. 피에르를 따라 벼룩시장 구경을 하는데 음악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대성당 문이 열리며 일요일 정오 미사를 마친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인산인해를 이룬 광장은 어느새 축제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카탈루냐 전통 민속춤 ‘사르다나’ 거리 공연을 보는데 중세 시대로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한바탕 신나게 현지 사람들과 어울리며 축제를 즐긴 피에르와 나는 다시 바르셀로나 골목길을 걷기 시작했다. 고딕 지구를 지나 구석구석 놓인 골목길을 지나는 동안 우리의 대화도 깊어졌다. 피에르가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나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다. 뭐, 특별하게 알려줄 것도 감출 것도 없다는 얼굴로 나이와 직업을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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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다른 일을 찾고 싶다는 말을 할 때, 그와 눈이 마주쳤다. 놀란 토끼 눈이 된 피에르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저, 정말 의사라고? 학생이 아니고?”

그는 내가 자기보다 어린 줄 알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동양 여자들 나이는 정말 가늠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려 보인다는 말에 슬그머니 기분이 좋아져서 배시시 웃음을 머금을 때였다.

후다닥 검은 그림자가 우리 사이로 뛰어들었다. 골목길을 비추던 햇빛에 날카로운 금속이 반짝이는가 싶더니 메고 있던 크로스백이 툭 떨어졌다.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크로스백을 낚아챈 검은 그림자가 쏜살같이 골목을 빠져나갔다.

“강도 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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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을 파악한 피에르가 소리를 지르며 검은 그림자를 따라 달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피에르를 따라 뛰기 시작하자 우사인 볼트를 능가할 나의 달리기 능력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모를 것이다. 내가 한때 육상 국가대표 꿈나무였고, 태권도 유소년 국가대표였다는 것을.

빛의 속도로 달려가 피에르를 따라잡고 막 검은 그림자의 등을 낚아채려고 할 때였다. 강도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얼굴빛이 창백하고 입술이 새파랬다. 시원하게 발차기를 날리려고 했는데, 맥없이 끝난 게임에 쭈욱 힘이 빠졌다. 그와 동시에 검은 그림자에게 다가선 피에르가 크로스백을 움켜쥐었다.

“가자. 얼른 여기서 나가야 해.”

피에르는 근처에 강도 일행이 있을 거라며 어서 가자고 나를 재촉했다. 그러고 보니 정신없이 뛰어든 골목길이 으슥하고 한기마저 서렸다. 자칫 강도 일행에게 나쁜 짓을 당해도 도와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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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를 따라 골목길을 빠져나갈 때였다. 바닥에 쓰러진 강도가 신음을 토하듯 소리를 질렀다. 고통에 발버둥 치는 가엾은 육체가 보였다. 병원 응급실에서, 병실에서 흔하게 보던 장면. 의사로서의 소명을 위협하고 공포에 떨게 했던 그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뭐해, 어서 가지 않고.”

나를 잡아끄는 피에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상하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서 여기를 빠져나가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고통에 젖어 몸부림치는 강도의 몸 위로 죽음이 내려앉는 환영마저 보였다. 이상했다. 아픈 사람이 싫었는데, 지긋지긋하게 싫기만 했는데, 내 몸은 어느새 그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의사라는 직업을 버리겠다는 결심도 나를 막아서지 못했다.

황급한 손길로 심폐소생술을 하며, 나도 모르게 마음으로 외쳤다. 살려달라고. 이 남자를 꼭 내 손으로 살리게 해 달라고. 온몸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가빠진 숨을 몰아쉬며 한순간도 놓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심폐소생술을 계속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 사이로, 골목길 끝으로 사라지는 피에르가 보였다. 내 여권과 지갑이 든 크로스백을 들고 유유히 사라지는 그놈이 보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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