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어느 날, 정확하게는 형제들이 함께 모여 어버이날 모임을 한 다음 날이었다.
강 여사가 외출복 차림으로 수경의 방문을 두드렸다.
"새아가, 나 파마하러 가게 돈 좀 다오."
"아, 네..."
지갑에서 돈을 꺼내던 수경던 은근 심술기가 발동했다. 어제, 분명히 효자, 효녀 자식들은 물론이고 효손들에게 엄청(?) 난 어버이날 기념 촌지를 받아놓고, 또 며느리에게 돈을 요구하는 강 여사가 슬쩍 얄밉다는 마음이 들어서였다.
"어머나, 파마할 돈이 없으세요?"
"응. 돈이 한 푼도 없네."
"에이, 어제 촌지 많이 받으셨잖아요? 저도 두둑하게 드렸는데... 그 돈은 다 어디 갔을까요?"
"아, 글쎄. 돈 없다지 않니?"
강 여사의 눈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더는 짜증 나게 시비를 걸지 말라는 신호다. 바로 꼬리를 내리고 강 여사에게 돈을 내미는 수경의 심사가 화라락 꼬여온다. 유난히 돈에 집착이 강했던 강 여사의 성정이, 그로 인해 힘들었던 오래된 기억이 스멀스멀 다가온다.
수경은 결혼하고 몇 년간 남편 월급을 구경조차 못하고 살았다. 시부모와 시누이, 그리고 수경부부가 함께 사는 대가족 살림을 갓 시집온 새댁에게 맡길 수 없다는 핑계로 강 여사가 곳간 열쇠를 거머쥔 탓이었다. 시어머니 말씀이 곧 법이 되던 그 시절, 스물다섯 살 힘없는 새댁 수경은 내 남편 월급이 시어머니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며느리란 자고로, 시어른께 순종해야 한다는 착한 며느리 콤플렉스도 한 몫했다.
문제는 시어머니 주머니로 들어간 돈은 결코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 남편의 월급을 몽땅 가져간 강 여사는 며느리 수경에게 돈 한 푼 주지 않았다. 근검절약만이 살길이라며 시어머니는 수경에게 알뜰살뜰하게 살림을 하라고 시켰다. 돈 한 푼 주지 않으면서 말이다. 강 여사는 장보기도 직접 했다. 재래시장이나 슈퍼마켓으로 수경을 데리고 다니며 장을 본 다음, 당당하게 지갑을 열었다. 수경의 역할은 시어머니가 산 물건을 들고 낑낑거리며 따라가는 것이 전부였다. 이런 사실을 안 수경의 외숙모가 혀를 끌끌 차며 참 안 됐다는 얼굴로 말했다.
"너도 참 딱하다 주부들은 장을 보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팍팍 푸는데, 그것도 못하고 사는구나. 아이고, 시집살이 한번 맵구나 매워."
강 여사의 입에서는 늘 "돈이 없다"는 말이 흘러나왔고, 시어머니가 겁나고 두려웠던 수경은 돈이 없다며 종종거리는 강 여사에게 차마 "용돈 좀 주세요."라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집안 살림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시집살이 지옥에 갇혀 살다 보니 외출을 거의 못해서, 돈 쓸 일이 별로 없다 보니, 그 모진 세월을 견뎌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아주 가끔 용돈이 필요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수경은 결혼 전에 비축해 두었던 비상금을 야금야금 꺼내 쓰곤 했었는데, 그마저도 친구 사업에 투자하자는 남편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비상금을 홀라당 날려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수경은 가끔씩 시누이가 쥐어주는 용돈이 전부였던, 암울한 시기를 살았다.
"나, 옷 좀 사게 돈 좀 주라."
"내가 돈이 어딨어? 엄마한테 월급 다 가져다주는데?"
예쁘게 차려입고 출근하는 시누이가 부러워서, 남편한테 옷 한 벌 사게 돈 좀 달라고 했다가 부부싸움을 한바탕 한 날, 수경은 어떻게든 다시 일을 시작하겠다는 결심을 했었다. 여자도 당당해지려면 우선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그리고 결혼 7년 만에, 강 여사와 치열한 갈등과 싸움 끝에, 수경은 드디어 곳간열쇠를 거머쥐었다. 남들에게는 별 일도 아닌, 처음부터 시부모를 모시지 않고 살았던 그녀의 친구들에게는 당연했던 일이 수경에게는 7년 만에 일어난 것인데,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