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페리고르-
6장 다시 시작하는 여정

by 소심한 삘릴리

6. 다시 시작하는 여정

콩크를 떠나 남서쪽으로 53Km, 1시간만 달려가면 피지악에 도착한다.

은서는 음울한 음악처럼 쓸쓸해지는 마음을 달래며 운전대를 잡은 태주를 가만히 바라본다. 그가 변했다. 함께 하지 못한 세월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인데, 은서는 태주의 변화가 한없이 낯설다.

새삼 그녀의 기억 속에 존재하던 그가 그립다. 그녀만 바라보고, 그녀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라주던 태주가, 그녀가 아무리 떼쓰고 억지를 부려도 불평 없이 받아주던 태주가, 걸핏하면 삐치고 토라지는 그녀를 항상 달래주고 넉넉한 가슴으로 안아주던 젊은 날의 태주가 눈물 나게 그립다. 3년 동안 미친 듯이 사랑하고 싸우기도 많이 했지만, 그가 화를 내거나 고집을 부린 적은 거의 없었다. 주로 시비를 걸고 화를 내는 건 그녀였다. 그녀의 고집과 억지가 극에 달하면 그때야 그의 말이 늘어진 카세트테이프처럼 느려졌다. 그가 폭발 직전의 화산처럼 화를 참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의 인내심이 한계를 드러내기 일보 직전, 영악한 은서는 못 이기는 척 스르르 고집을 꺾으며 괜한 트집을 잡아 눈물 바람을 일으키곤 했다. 그러면 바보처럼 착한 그는 말없이 그녀를 안아주며 따뜻하게 등을 토닥여주었다. 은서는 지금도 포근하고 아련한 그 느낌을 잊을 수 없다.

그녀를 덮어버린 세월이 너무 무거웠다.

은서는 태주의 여행 스타일이 생소하다. 오래 만나도 서먹서먹한 친구처럼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 줄리앙과의 여행은 주로 휴가지의 별장을 빌려서 그곳에 머무르는 것이 전부였다. 브르타뉴 바닷가 마을이나 생 트로페나 니스 같은 지중해 마을에서 머물며 나무늘보처럼 늘어져서 먹고 자고 쉬는 것이 그녀의 여행이었다. 패키지여행으로 모로코나 튀니지를 다녀온 적도 있었는데, 관광보다 리조트에 박혀서 수영을 하거나 책을 읽다 오는 것이 전부였다. 나머지 여행들은 즉흥적일 때가 많았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면 그냥 여행 가방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호텔 예약은 물론이고 여행지를 정하지 않고 떠난 적도 있었다. 그래도 여행은 즐거웠다. 파리에서 테제베를 타고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해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따뜻한 포도주 방쇼를 마시며 행복해했고, 어떤 날은 부르고뉴 지방의 와인 가도를 달리다가 비엔에서 질 좋은 부르고뉴 와인을 잔뜩 사서 돌아가기도 했다. 알프스에 오르고 싶다는 줄리앙 때문에 갑자기 갤러리 문을 닫고 스위스 인터라켄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제 이집트의 석양을 보고 싶다며 거침없이 비행기를 타는 줄리앙의 여행을 잊거나 그의 여행 스타일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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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악으로 가는 동안 은서는 아이폰으로 여행지 정보를 검색한다.

피지악은 로제타스톤을 해독한 장 프랑수와 생포리옹의 고향이라는 것과 12세기에서 14세기에 지은 집들이 즐비하다는 것 외에 이렇다 할 특별한 것 없는 작은 마을이다. 태주는 대영박물관에서 본 로제타스톤의 감동이 떠올라 피지악을 여행코스에 넣었다고 했다. 피지악이 생포리옹의 고향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은서는 프랑스에 사는 내내 그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안 했다. 생활자의 눈보다 여행자의 눈에 더 많은 곳이 보이나 보다.

“작은 마을이니까 30분이면 다 볼 수 있을 거야.”

주차장에 차를 세운 태주가 마을을 바라보며 야심가 같은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묵직한 체증이 느껴진다. 은서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문지르며 크게 심호흡을 해본다. 이건 여행이 아니다. 추적자가 되어서 30분 동안 마을을 수색하고, 범인을 못 찾은 얼굴로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다. 겨우 30분간 여행하려고 1시간을 달려오다니,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꼭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산만한 아이를 보는 것 같다. 후유, 은서는 깊은숨을 몰아쉬며 그를 바라본다. 그녀를 전혀 알아채지 못한 태주의 무심한 발길이 마을로 향한다. 소풍 나온 아이처럼 흥겨워 보인다. 은서는 체념한 듯 천천히 그를 따라 마을로 들어선다.

그와 함께했던 3년의 세월은 색을 칠하지 않은 밑그림 같았다. 서로를 향한 마음을 그려 넣었으나, 어떤 색을 칠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모르던 시절이었다. 지금 그녀는 노란색을 칠하고 싶지만, 태주가 파란색을 원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녀의 색을 포기하고, 그가 원하는 색을 칠해야 할지, 그렇게 완성된 그림을 좋아하게 될지, 이제부터 생각해야 한다.

“장 프랑스와 생포리옹의 부모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서점을 운영했다는 거 알아?”

길 안내를 따라 에크리추르 광장으로 가는 골목길로 접어들던 태주가 은서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가만히 그녀의 어깨와 팔을 쓰다듬는 손길이 부드럽다.

“게다가 그는 콥트어, 그리스어, 라틴어까지, 10개 국어를 하는 천재였대.”

“천재가 살았던 마을이라 그런가, 마을 분위기가 왠지 학구적으로 느껴져.”
“그래. 천천히 산책하기에 참 좋은 곳이야.”

어느새 그의 단단한 손이 은서의 가녀린 손을 그러쥔다. 서러운 눈물을 흘리지 않더라도 슬픔을 알아차리고, 아무 말하지 않더라도 속말을 이해해 줄 것 같은 따뜻한 손이다. 은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노란색을 버리고 그가 좋아하는 파란색에 익숙해져야 할 것 같다. 그녀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의 묵묵한 손을 내려다본다.

좁은 골목을 지나자 육중한 돌로 지어진 중세풍 건물에 둘러싸인 광장이 나온다. 광장 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확대 복사를 해 놓은 로제타스톤. 3단의 검은색 돌은 로제타스톤 그대로 상형문자, 이집트 민중 문자 그리고 그리스 문자로 이루어져 있다. 태주와 은서가 조심스럽게 복제된 로제타스톤 주위를 서성거리며 뜻 모를 글자들을 보는데, 어느 골목에선가 아이들이 우르르 광장 중앙으로 뛰어나온다. 병아리들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조잘조잘 떠드는 아이들을 바라보자니 입가에 지그시 행복이 머문다. 그녀의 시선이 자꾸 아이들에게로 향한다. 무슨 놀이를 하는지 아이들은 글자를 하나씩 밟고 다니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린다. 아이들 발이 글자 안에 쏙 들어갈 정도로 글씨들이 크다.

“여기 쓰인 글씨들이 무슨 뜻인 줄 알아?”

태주가 아이들을 피해 복사된 로제타스톤으로 걸음을 옮기며 속삭이듯 묻는다. 그의 손을 잡고 냉큼 가짜 로제타스톤 위로 올라선 은서의 머릿속이 미로처럼 얽혀 든다. 생포리옹은 이 뜻 모를 글자들을 어떻게 해석해 낸 것일까.

“기원전 196년경, 파라오였던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위대함과 그가 베푼 은덕을 칭송한 글 이래.”

“그러니까, 공덕비인 셈이네.”

“그런 거지. 어쨌든 생포리옹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이걸 그냥 까만 돌덩이로만 여겼을 거야.”

은서는 거대한 로제타스톤 복사품을 슬며시 내려다본다. 생포리옹이 언어의 벽을 뚫고 생명을 불어넣은 전리품과 마주한 순간, 줄리앙의 사랑이 혼란스러웠던 것이 언어 때문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랑스로 유학 와서 계속 프랑스 말을 하고 살았어도 낯선 프랑스어는 복병처럼 나타나 그녀의 삶을 어지럽히곤 했다. 줄리앙을 사랑하면서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증오했던 것은 어쩌면 언어가 만들어낸 괴리 때문인지 모른다. 줄리앙이 쏟아내던 아름다운 프랑스어 속에는 그녀가 죽어도 알지 못할 암호가 녹아서 독이 되었는지 모른다. 다시 가슴이 답답해진다. 진한 에스프레소를 한잔 마시고 싶다. 은서의 시선이 광장 너머 카페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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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로카마두르로 갈까?”

“벌써? 카페에서 커피 한잔 마시고 가자.”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다. 은서는 굳어지는 태주의 표정을 무시하며 골목길을 지나 마을 중앙광장에 있는 카페로 발길을 옮긴다.

“앙뽀르떼? 저거, 테이크아웃도 된다는 소리지?”

카페 앞에서 태주가 반갑게 웃는다. 요즘 프랑스 카페들도 미국 흉내를 내는 곳이 많이 늘었다. 은서는 마지못해 테이크아웃으로 자신의 에스프레소와 태주의 카푸치노를 주문한다.

“난 아무리 노력해도 에스프레소는 적응 못 하겠더라.”

테이크 아웃한 커피를 들고 주차장으로 가며 태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은서는 크림이나 설탕이 들어간 커피는 싫다. 가끔 속이 쓰릴 때, 커피에 우유를 넣어 마셔도 설탕은 사절이다. 케이크와 초콜릿처럼 달콤한 디저트는 용납해도 설탕이 들어간 커피는 받아들일 수 없다. 반대로 태주는 달달한 설탕과 고소하고 부드러운 크림 맛으로 커피를 마신다. 그의 커피 취향은 오늘 처음 알았다. 문득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녀가 하고 싶은 것을 하던 태주의 옛 모습만 떠오른다.

예전의 은서도 특별히 고집하는 건 없었다. 연애에 관한 모든 그녀의 취향과 습관은 태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가난한 연인을 배려하는 것이 연애의 최우선 순위였다. 그녀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햇살이 좋은 날에 은서는 춘천 가는 기차를 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그의 손을 잡고 남산을 올랐다. 단풍이 아름다운 날에는 그의 학교 잔디밭에서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었다.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학교 숲길을 걷다 슬쩍 업어달라고 어리광을 부리기도 했다. 영화는 무조건 조조할인을 받는 거나, 변두리 영화관에서 하는 동시 상영 영화를 고집했다. 서울 시내 투어를 하고 싶다며 버스를 타고 종점과 종점을 오가던 날들도 많았다. 모두 태주의 빈한한 주머니에서 비롯된 그녀의 취향이었다. 사랑에서 시작된 배려는 그러나 행복의 터널을 지나자 피곤함의 고비를 만났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줄리앙을 만나 속절없이 빠져든 것도 피곤한 배려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사소한 기쁨 때문이기도 했다.

은서는 태주와 함께 다시 출발 선상에 선 기분이다. 지금까지 그녀가 알았던 아니 알고 있다고 믿었던 태주는 과거 속에 박제된 모습이거나 그녀가 만들어낸 허상일지 모른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그를 다시 알아나가는 기쁨으로 이번 여행이 가득하기를 바라며 은서는 태주를 바라본다.

자동차 시동을 걸고 내비게이션에 다음 목적지 로카마두르를 찍는 그의 옆얼굴이 진지하다. 짙은 눈썹과 쌍꺼풀 없이 커다랗고 서글서글한 눈을 지나 조각상처럼 날렵하고 오뚝한 콧날 위로 은서의 시선이 머문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작은 떨림이 전해진다. 세월마저 비껴간 그의 얼굴을 흘끔이며 은서는 테이크 아웃한 에스프레소를 홀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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