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여행- 프랑스/ 파리 2
“유학생이세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귀신에 홀린 듯 그녀에게 말을 걸었고, 주절주절 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족에게도 숨겨왔던 내 마음의 진실을 처음 보는 그녀에게 보여주고 오래된 친구처럼 가슴에 담아둔 비밀을 털어놓았다. 한 시간의 대화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서 쥴리 델피와 에단 호크가 마음이 맞아 비엔나 기차역에 내렸던 것처럼, 우리는 에펠탑을 내려와 몽마르트르 언덕을 걸었다. 당연히 영화 <아멜리에> 이야기를 했고, 영화에 나왔던 카페를 찾아가 커피를 마셨다.
그녀는 나를 마르셀 에메 광장으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소설 《벽을 드나드는 남자》의 주인공 뒤뛰유윌이 있었다. 벽을 드나드는 초능력을 지녔으나 그 능력을 너무 써버린 나머지, 벽을 통과하다 벽에 갇혀버린 남자의 동상을 바라보며, 나는 그녀가 전공하는 프랑스 문학과 그녀가 사랑하는 소설가 마르셀 에메에 관해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인생이 뿌리 뽑히는 아찔함을 넘나들며 수많은 대화를 엮어나갔다.
세상에 나의 반쪽이 존재한다면 그건 바로 그녀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동시에 내일이면 파리를 떠나야 한다는 현실도 두려움처럼 엄습했다. 그녀를 두고 떠날 생각에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베리아 벌판에 홀로 선 나그네처럼 가슴이 시렸다.
“우리, 또 만날래요?”
“……”
“1년 뒤, 아니 비포 선라이즈처럼 6개월 뒤, 어때요?”
말을 꺼내고 아차, 했다. 6개월 뒤에 비엔나 기차역에서 만나기로 한 <비포 선라이즈>의 연인들은 결국 만남을 이루지 못했고, 9년 후에야 파리에서 어색한 재회를 했으니까.
“그럼, 10년 후… 어때요?”
오랜 망설임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는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의 준세이와 아오이가 이탈리아 피렌체 두오모에서 10년 후에 재회하고, 결국 해피엔딩을 이룬 것을 떠올렸다. 우리는 10년 후 오늘, 처음 만났던 에펠탑 카페테라스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미련과 희망을 남긴 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야 했었다.
에펠탑을 지나는 바람이 맹수보다 사납다. 그날의 만남을 떠올리며 서울에서부터 가져온 책 《살아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를 뒤적거리던 나는 야경으로 물든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에펠탑에 나를 내려놓고 그녀를 기다린 지 10시간째다. 아아, 아무래도 그녀는 오지 않으려나 보다. 약속을 잊은 것일까? 아니면 약속을 지키지 못할 사정이 있는 걸까? 밤 10시 반이 지났다. 이제 그녀를 기다리는 일은 무의미하다. 긴 한숨과 함께 그녀를 포기하고 일어서는데 다리가 휘청했다. 온종일 먹은 것이라고는 하이네켄 생맥주 3잔에, 에스프레소 커피 두 잔이 전부였다. 터덜터덜 에펠탑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발걸음이 서글펐다. 비참했다. 바람을 맞을 줄 몰랐다. 그녀를 만나서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려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10년 전 그날을 기억하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 암담했던 나의 20대를 추억하고, 무사히 지내온 나의 30대를 자축하고 싶었는데… 허망했다. 아, 그녀는 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현관문을 열어주는 처제의 얼굴이 활짝 핀 꽃처럼 환했다. 스웨덴으로 출장 간 남편과 영상통화 중이다. 통화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서둘러 손님방으로 들어왔다. 침대를 가득 차지한 아내가 코까지 골며 정신없이 자고 있다.
순간, 종일 참아온 짜증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욱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잠든 아내에게 베개를 집어던졌다. 단 하루의 일탈도 용납하지 않는 아내가 미워 죽겠다. 억지로 분을 참으며 외투를 벗는데, 아내가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그 여자 절대로 안 나올 거라고 그랬지? 이제, 당신 기억 속에서 그 여자 지워!”
아, 정말 싫다. 황소고집에 낭만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이 여자, 정말 밉다.
내가 미쳤지. 10년 전 그날, 어쩌자고 한국행 비행기 대신 그녀를 잡았단 말인가. 10년 전보다 두 배나 뚱뚱해진 아내를 바라보며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음 같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아, 세라비(c’est la vie). 이것이 인생이라는 서글픈 프랑스 샹송이 귓전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