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여행 -이탈리아/ 베네치아 1
은애가 남자를 만난 건 베네치아 수상버스 바포레토에서였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하려고 막 정류장으로 들어오는 수상버스를 잡아탔고, 기절할 듯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남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어?”
은애와 남자는 서로를 알아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유럽여행 중이신가 봐요.”
“네. 그쪽도요?”
얼떨결에 인사를 하던 은애는 아차, 싶었다. 이 남자가 누군지 생각나지 않았다. 누구였더라? 두루뭉술하고 귀여워 보이는 얼굴에 배까지 적당히 나온 이 오동통한 남자를 어디서 봤더라?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베네치아 처음이세요? 저는 세 번째 오는데, 올 때마다 느낌이 달라요.”
남자가 듣기 좋은 중저음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절거리는 동안, 은애는 그가 누군지 기억하려 애쓰고 있었다. 이런,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정신을 집중해도 도무지 모르겠다. 회사에서 오가며 마주친 얼굴일까? 혹시 작년에 다니던 영어학원에서 본 사람? 그것도 아니면 그냥 동네 아저씨? 에잇 모르겠다. 제풀에 지친 은애의 기분이 급격히 다운됐다. 모처럼 혼자만의 여행인데,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 때문에 방해를 받은 것 같아 짜증도 났다.
“어머, 소나기가 그쳤네요. 저는 여기서 내릴게요. 그럼, 즐겁게 여행하세요.”
바포레토가 정류장에 멈추자 은애는 서둘러 작별을 하고 냉큼 수상버스를 빠져나왔다. 그녀의 돌발행동에 놀란 남자가 어어, 하며 허둥거리는 사이 바포레토 문이 닫혔다. 휴, 멀어지는 바포레토를 바라보며 은애는 이제야 안정을 찾은 느낌이 들었다. 가라앉았던 기분이 스르르 좋아지며 홍홍 콧노래도 나왔다. 이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베네치아에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여행을 즐길 차례다.
은애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천천히 그녀만의 여행을 시작했다. 좁은 골목길을 걸으며 오래된 건물의 향기를 맡고, 골목길 끝에서 만난 광장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예쁜 물건으로 가득한 기념품 가게를 둘러본 뒤, 검색으로 찾은 맛집에서 랍스터 파스타를 먹으며 오롯이 그녀만의 시간을 보냈다.
가문에 없는 노처녀 딸 때문에 살맛 안 난다며 우울해하는 아빠와 주말마다 선보러 나가라고 닦달하는 엄마를 벗어난 것만 해도 천국에 온 기분이었다. 그렇게 달콤한 행복에 겨운 그녀가 딸기 맛 젤라토를 입에 물고 리알토 다리로 천천히 다가설 때였다.
“어, 또 만났네요.”
리알토 다리를 걷던 남자가 그녀를 발견하고, 이산가족상봉이라도 한 것처럼 반갑게 다가왔다.
이런, 몹쓸 우연이 또 있다니… 은애는 마지못해 억지 미소를 지으며 그와 마주 섰다. 아, 다시 봐도 가물가물하니 생각이 안 나는 얼굴이다. 분명히 아는 사람 같은데, 그가 누군지 정말 모르겠다.
“잘됐다, 리도섬 갈 건데, 우리 같이 갈래요?”
은애는 천진함으로 중무장한 남자를 차마 내칠 수 없었다. 아는 남자와 리도섬을 걷는 것도 나쁘지 않은 그림 같았다. 그녀는 남자를 따라 리도섬으로 가는 수상버스를 탔다. 화려한 호텔들이 즐비하고 해변에는 비키니를 입은 미녀들이 선탠을 즐기는 리도섬. 그곳은 매년 베니스영화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영화 사랑꾼인 은애는 영화제 기간이 아니라도 세계 3대 영화제가 열리는 베를린과 베니스 그리고 칸은 꼭 가보고 싶었다.
“어떤 영화 좋아하세요?”
베니스영화제를 생각하며 은애가 불쑥 질문을 날렸다.
“슬픈 영화요. 영화는 무조건 슬퍼야 해요.”
영화는 무조건 슬퍼야 한다는 건, 그녀의 지론이었다. 은애는 놀랍고 신기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