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여행- 이탈리아/ 베네치아 2
“그래야 팝콘 먹으면서 엉엉 울 수 있고, 스트레스도 쫙~ 풀리잖아요.”
은애는 하마터면 손뼉을 치며 동조할 뻔했다. 갑자기 두리두리 곰 같은 이 남자가 친근하게 느껴지며 그와 동행하기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리도섬을 산책하며 은애와 남자는 각자의 여행 일정과 여행지에서 맛본 음식과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을 이야기했다. 뜻밖에도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았다. 맥주보다는 와인을 좋아하고, 달달한 커피보다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를 즐기고, 자기 계발서보다 소설이나 에세이집을 읽고, 일본 소설가 중에서는 히가시노 게이고를 좋아하고, 은근히 잘난척하는 알랭 드 보통이 괜히 싫고, 고기보다는 생선을, 과일보다 채소를 선호하는 것까지 참 많은 부분이 닮아 있었다.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그가 누구인지 추적하는 은애의 안테나는 멈추지 않았다. 와인을 좋아한다는 말에 와인 동호회 멤버인지 슬쩍 떠보았더니 역시나 아니었고, 도서관에 자주 간다는 말에 혹시 도서관에서 마주친 얼굴인가 싶어 사는 동네를 물어보기도 했다. 아니었다. 취향은 같아도 은애와 남자 사이에 현실의 공감대는 하나도 없었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에 대한 호감이 짙어질수록, 남자에 대한 궁금증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우울한 날은 뭐해요?”
“걸어 다녀요. 다리가 아플 때까지 걸은 다음에 커피를 마시며 나를 위로해요.”
“어, 나도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궁금증이 더는 참지 못하고 빵 터져버린 순간. 두 사람이 1번 바포레토를 타고 리도섬을 나와 52번과 41번 바포레토를 연달아 갈아타고 막 무라노섬에 내렸을 때였다.
“혹시, 우리가 언제, 어디서 만난 사인지 아세요?”
은애는 폭탄을 투하하듯 몹쓸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아주 잠깐 침묵이 흘렀고, 당황한 그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갑자기 어색해진 기류에 은애의 얼굴도 후끈 달아올랐다. 화장 안 한 맨얼굴로 외출했다가 짝사랑하는 남자를 만난 것 같은 민망함이 엄습했다.
“우, 우리는 오늘, 바포레토에서 만났어요.”
어색한 침묵을 깨고 남자가 은애를 바라보았다.
“네?”
“사실, 저도 난감했어요. 분명 아는 얼굴인데,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만난 사인지 생각이 안 나서요.”
고해성사 같은 그의 말에 비로소 은애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 이 남자도 그랬구나.
“근데 뭐 어때요? 이렇게 만났는데… 정식으로 인사하죠, 우리.”
남자가 두툼한 손을 내밀며 진솔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고민영입니다.”
그 순간, 은애의 머릿속 기억의 회로에 번쩍 불이 켜졌다.
아, 이 남자… 작년 이맘때 소개팅을 한… 오동통하고 두리둥실 한 몸에 푸근한 얼굴을 가진, 이름마저 곰 인형이던 남자. 키 크고 샤프한 남자를 좋아하는 그녀가 곰 같은 남자가 이름까지 곰 인형이 뭐냐며 단번에 퇴짜를 놓고, 기억에서 지워 버린 '소개팅남'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조은애입니다.”
조은애는 푸훗 터지는 웃음을 참으며 고민영의 손을 잡았다. 푸근하고 참 따뜻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