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여행-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1
암스테르담 P사에서 열린 2박 3일간의 긴긴 회의가 끝났다. 휴, 팽팽하던 긴장의 끈이 스르륵 풀어지며 재근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올 때였다. 그의 암스테르담 프로젝트 파트너 한스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재근, 아이 엠스테르담(I amsterdam) 알아?”
“응. 지난여름에 왔을 때 가봤는데, 참 특이하고 멋지더라.”
“당연하지. 암스테르담의 슬로건이자, 랜드마크잖아. 그럼, 아이스 암스테르담도 알아?”
“어? 암스테르담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이야?”
“하하, 거긴 모르는군. 우리 거기 가서 맥주 한 잔 할까? 내가 살게.”
잘생긴 한스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흘렀다. 뜻밖의 초대였다. 더치페이로 유명한 네덜란드 사람이 술을 사겠다니, 의외이기도 했다. 이번 암스테르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한스와 수없이 화상통화를 하고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어느새 정이 들었나 보다. 역시 재근의 짐작이 맞았다. 한스는 첫인상은 차가워도 화롯불처럼 뭉근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남자였다.
국립미술관과 반 고흐 미술관 그리고 시립미술관으로 둘러싸인 미술관 광장에 도착한 재근의 눈이 놀라움으로 반짝였다. 커다란 광장이 아이스링크로 변해 있었다. 이름 하여 아이스 암스테르담이었다.
재근은 뭉클한 감동에 젖어 아이스링크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어스름한 해 질 녘, 개와 늑대의 시간에 만난 아이스 암스테르담은 서울광장의 아이스링크보다 로맨틱했다. 나무로 울타리를 두른 야외 스케이트장 주변에는 반짝이 꼬마전구로 장식한 겨울나무들이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재근은 신이 난 아이처럼 깡총 걸음으로 아이스링크로 다가갔다. 차가운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겨울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쌀쌀한 겨울 날씨에도 아랑곳 않고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이 만화 주인공들처럼 정겹게 느껴졌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의 입에선 까르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재근은 누군가 행복을 그려달라고 한다면, 지금 바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 풍경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이, 구경 다 했으면 얼른 맥주 마시러 가자. 나, 목말라.”
한스가 잔뜩 술이 고픈 얼굴로 재근을 재촉했다. 그는 한스를 따라 아이스 암스테르담 근처 캐주얼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암스테르담에서 유명한 맛집으로 소문이 자자한 곳이었다. 그런데,
“주문하시겠습니까?”
메뉴판에 코를 박고 음식을 고르던 재근이 웨이트리스의 채근을 듣고 막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거짓말처럼 그의 눈앞에 서경이 서 있었다. 가늘고 긴 눈에 날카로운 콧날 그리고 콧부리에 오롯이 내려앉은 깨알만 한 점까지. 서경이 틀림없었다. 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서, 서경아…… 그의 입술이 신음을 뱉어내듯 파르르 떨렸다.
“왜 그래? 혹시 아는 사람?”
한스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재근의 가슴 깊은 곳에서 사르르 차가운 바람이 일었다. 뭐라 말해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웨이트리스가 무심한 얼굴로 주문을 재촉했다. 재근은 안중에도 없다는 얼굴이었다.
“오, 오랜만이다. 서경아.”
재근이 겨우 용기를 내서 서경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표정이 덤덤했다.
“죄송합니다만, 영어로 주문해주시겠어요? 제가 다른 외국어는 몰라서요.”
재근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낯설었다. 아무리 이별이 아팠다지만 이렇게까지 모르는 척, 외면하다니. 재근은 쓰디쓴 감기약을 한 움큼 삼킨 것처럼 가슴이 묵직해졌다. 그래도 7년 만인데, 멀리 타국에서 우연처럼 만났는데…… 인사 정도는 나눌 수 있지 않은가.
“한스, 정말 미안한데, 우리 다른 데로 옮기자. 이번엔 내가 살게.”
야속한 마음에 재근은 레스토랑을 나왔다. 그를 외면하는 그녀와 한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와 애틋했던 사랑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가끔 멜랑꼴리 한 감상에 젖어 꺼내보곤 했었는데……
아, 갑자기 사랑이 허무해졌다. 그날 재근과 한스는 맥주를 마시며 사랑의 허망함과 무정함을 이야기했다. 한스의 채근에 못 이겨 재근은 서경과의 사랑을 시시콜콜 털어놓기도 했다.
도서관 식당에서 친구 녀석이 장난으로 그의 어깨를 쳤고, 그 충격에 들고 있던 식판을 놓쳤고, 식판에 있던 음식들이 마주 오던 서경에게로 쏟아진 일.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허둥거리는 그를 본 서경은 화를 내는 대신 웃음을 터트렸던 순간. 그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함께 커피를 마셨고, 어느새 밥을 먹고 영화를 보러 가는 연인이 된 이야기까지.
“그럼, 같이 산거야?”
“아니, 우린 너희와 정서가 좀 달라. 아직은 혼전동거가 흔하지 않거든.”
“근데 왜 헤어진 거야? 싫증 났어?”
“그건 아니고.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우린, 비 때문에 헤어졌어.”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