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페리고르-
9장 와인향기에 젖은키스

by 소심한 삘릴리

9. 와인 향기에 젖은 키스

커피를 주문하는 은서의 목소리가 날카롭다. 평소 상냥하고 친절한 꽃집 아가씨 같던 그녀의 프랑스어가 딱딱하게 굳은 냉동실 인절미처럼 한기에 서렸다. 심드렁한 표정도 마음에 걸린다. 실컷 쇼핑하고 와서 웬 심술이람. 은서를 기다리다 지친 태주의 양미간에 저절로 주름이 잡힌다. 은서가 툭 테이블 위로 선물상자 하나를 떨어트리더니 스케치북을 가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그녀를 기다리느라 얼마나 지루하고 힘들었는데, 그런 그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얼굴이라니. 괜히 약이 오른 태주가 농담을 가장해서 진심을 슬쩍 비친다.

“뭐야? 한 시간 동안 겨우 이거 하나 샀어?”

“미안한데, 나, 그림 좀 그릴게.”

낮고 정중한 그녀의 목소리에 화가 잔뜩 묻어있다. 적반하장 같지만, 그녀가 화를 내고 있다. 협박당한 소시민처럼 그의 신경세포가 잔뜩 긴장한다. 그녀에게 꼼짝 못 하고 쩔쩔매던 오래된 습관이 그의 몸을 포박하며 야비한 웃음을 보낸다. 그의 목소리에 저절로 힘이 빠진다.

“어? 농담한 건데, 화났어?”

태주는 얼렁뚱땅 상황을 모면하며 슬쩍 그녀의 눈치를 살핀다. 다행히 은서의 표정이 풀어진다. 석양을 보겠다며 스케치북도 접는다. 아까 내려왔던 길을 다시 천천히 걸어 올라가려고 했던 그는 은서의 기세에 눌려 로스피타레 구시가지로 가는 꼬마 관광 열차를 탄다. 아무리 관광용이라지만 마을 길을 잠시 돌아서 올라가는 기차 요금이 황당할 정도로 비싸다. 역시 프랑스다.

“저 레스토랑은 어때? 저기서 석양이 잘 보일까?”

구시가지로 올라오자마자 은서가 레스토랑을 찾는다. 마을 언덕에 대강 걸터앉아 석양을 바라보려던 태주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친다. 그러고 보니, 벌써 저녁 시간이다. 콩크에서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으며 음식에 대한 예의는 저녁에 차리자고 했었다. 카페에서 음료수를 많이 마신 탓에 아직 밥 생각도 없는데, 의무처럼 저녁을 먹으려니 벌써 속이 더부룩해진다.

은서는 몇 군데 레스토랑을 돌아다니다 커다란 창으로 마을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곳을 찾아낸다. 작고 심플한 입구와 달리 실내가 넓고 모던한 분위기의 레스토랑이다. 흰색 리넨 식탁보가 정갈하게 씌워진 테이블 사이로 작은 무대가 보이고, 피아노와 기타가 인테리어 장식처럼 편안하게 놓여있는 곳이다.

“봉수와.”

마음씨 좋아 보이는 땅딸보 남자가 창가 테이블로 안내를 해주고, 메뉴판을 건넨다. 관광객이 많은 마을답게 영어 메뉴판이다.

“난, 식전주로 끼르를 마실 거고, 앙트레는 염소 치즈가 들어간 샐러드가 좋겠다. 음, 디저트는 퐁당 쇼콜라로 먹고 싶은데, 메인 요리를 뭐로 할지 모르겠네?”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은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무의식 중에 태주의 눈이 은서가 선택한 메뉴들로 향한다. 관광지라 그런가, 카바레 무희처럼 화려한 음식값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우리 집은 페리고르 전통방식으로 요리하는 푸아그라가 유명합니다.”

태주의 시선이 얼른 땅딸보 남자가 추천한 요리로 향한다. 역시나 이 집에서 제일 비싼 요리다. 땅딸보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은서와 태주를 바라본다. 그 웃음이 “설마, 돈 몇 푼 때문에 이렇게 맛있는 요리를 포기하겠다는 건 아니지?” 하고 묻는 것 같다.

은서를 따라 푸아그라를 주문하며 태주의 머릿속은 음식값을 계산하느라 분주하다. 벌이가 좋아지고, 살기가 넉넉해졌어도 버리지 못하는 그의 가난하고 낡은 습성이다. 태주는 이렇게 좀스러운 자신이 싫다. 정말 싫은데, 오래되고 고약한 습관이 잘 고쳐지지 않는다. 그냥 낭비는 나쁜 것이라고, 몸에 새겨진 근검절약 정신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뿐이라며, 자신을 변명할 뿐이다.

레스토랑으로 손님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마을을 가득 메웠던 관광객들의 발길이 모두 이곳으로 향한 것 같다. 여기저기서 영국식 영어가 들린다. 그 틈을 비집고 프랑스어를 쓰는 남자들이 태주의 옆 테이블로 자리를 잡는다. 수수한 옷차림이 민망할 정도로 모델 같은 몸매에 잘생긴 얼굴들이다. 금발 남자가 은서 옆자리로 앉는다. 코발트블루 색 눈동자가 아름답게 빛난다. 가깝게 놓인 테이블 탓에 남자가 꼭 그녀의 일행처럼 느껴진다.

태주가 잠시 금발 남자에게 한눈을 파는 사이, 은서가 생테밀리옹 레드 와인을 주문한다. 푸아그라 요리를 넘어서는 가격이다. 내색은 못 하지만 경비 초과다. 태주는 들키지 않게 가벼운 한숨을 쉰다. 이렇게 먹고 마시는 여행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저녁을 먹을 일이 잘못 들어온 사우나처럼 갑갑하고 불편해진다. 간단한 요리 하나만 먹고 저녁 산책을 즐기다가 산뜻하게 잠자리에 들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해진다. 호텔까지 한 시간 정도 운전을 해야 하니, 그는 마음 놓고 와인을 마실 수도 없다.

은서는 달콤한 끼르를 마시며 레스토랑을 둘러본다. 미소를 머금은 얼굴에 보들보들한 행복이 가득하다. 식도락을 즐기는 프랑스인들이 짓는 바로 그 표정이다. 은서의 몸과 마음에 흠뻑 스며든 프랑스 정서가 왜 이리 낯선지 모르겠다. 매끈한 살갗에 돋아난 종기처럼 거슬리는 이 상황을 그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포커페이스에 익숙하지 못한 탓에 속내를 들키는 건 아닐까 걱정이다.

더 언짢은 건, 석양을 보겠다던 그녀의 태도였다. 일부러 창가 자리에 앉은 그녀는 음식이 나오자 석양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먹고 마시는 것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린다. 그런 그녀가 얄미운 시누이처럼 못마땅하다. 그의 심사가 꼬인다. 이제야 생각난다. 은서는 이렇게 제멋대로인 여자였다. 뭐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면 참지 못하는 여자였다. 스무 살의 그는 은서의 이런 성격과 발랄함을 사랑하면서도 또 그 성격 때문에 참 많이도 싸웠다.

여전히 그녀는 창밖의 풍경보다 레스토랑 분위기에 젖어있다. 석양이 로카마두르를 품고 지나가는 동안 창밖으로 시선 한번 주지 않는다. 주문한 음식을 하나하나 음미하며 먹는 행위에 빠져있다. 조금 전의 새초롬하던 표정은 어느새 사라졌다. 감동적인 표정으로 와인을 마시며 염소 치즈가 들어간 샐러드와 푸아그라 요리를 맛있게 먹는다. 제길. 태주는 영 입맛이 쓰다.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인간들이 프랑스 요리를 세계 최고라고 떠들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음식에 대한 예의를 지키느라 아니 그보다 음식값에 대한 본전을 생각하느라 태주는 밀린 숙제를 하듯 주문한 요리들을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 넣는다.

디저트를 기다리는데, 레스토랑이 시끌시끌해지며 재즈 연주가 시작된다. 실내조명이 조금씩 어두워진다. 창밖으로 보이던 마을 계곡도 어느새 짙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음악에 맞춰 어깨를 들썩이던 관광객들이 하나둘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 분위기에 젖은 은서도 몸을 흔들며 서빙을 하는 땅딸보 남자를 불러 생테밀리옹 한 병을 더 주문한다.

이런, 혼자서 그 비싼 생테밀리옹을 다 마셔버리다니. 태주가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그녀를 말린다.

“그만 마시고 나가자.”

태주가 일어서려는 순간, 바람 빠진 것처럼 싱거운 프랑스 악센트 영어가 들린다.

“혹시, 일본 분이세요?”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금발 미남이 은서에게 말을 걸어온다.

“아니, 한국인입니다. 그쪽은 프랑스 사람? 미국식 영어를 하는 거 보니까, 미국에서 공부한 거 같은데, 맞아요?”

말 걸기를 기다렸다는 듯, 은서가 능숙한 프랑스어도 이야기를 풀어간다.

“와, 우리말을 잘하네요.”

남자가 감동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본다. 남자를 바라보는 은서의 눈빛이 호기롭다. 태주는 굳어지는 표정을 애써 감추며 시계를 흘끔거린다. 더 늦어지다가는 호텔 체크인을 못 할지 모른다. 페리고르 특선이라며 땅딸보 남자가 권해준 푸아그라 요리의 뒷맛이 느끼하게 올라온다.

어느새 은서는 능숙한 프랑스어로 금발 미남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물 만난 고기처럼, 오래된 친구처럼 분위기가 활기차다. 프랑스어가 서툰 태주는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 엄두를 못 낸다. 어서 레스토랑을 나가고 싶은데, 어디서 어떻게 말을 끊어야 할지 모르겠다. 음악 소리가 거리의 소음처럼 커진다. 깔깔거리는 은서의 목소리 톤도 덩달아 높아진다. 그녀를 바라보는 태주의 시선에 노여움이 깃든다. 불쑥,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옛날 승우 선배와의 기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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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우 선배 문제로 크게 싸우던 날, 분을 참지 못한 은서는 태주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차고 택시를 탔다.

“어디 가?”

“승우 선배한테 간다. 왜?”

은서는 막아서는 태주를 모멸 차게 뿌리치고 떠났다. 동아리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겨우 흥분을 가라앉힌 태주는 모임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그녀를 찾아 동숭동으로 향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동아리를 그만둔 터라, 동아리 멤버들과 마주치는 것이 어색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한동안 건물 앞을 서성이던 그는 용기를 내서 동아리방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가 복도 구석에서 민석을 기다렸다.

“브레이크 타임에 승우 선배랑 같이 나가더니 안 들어왔어.”

“어디로 간다는 말은 없었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뭐 근처 카페에 있겠지. 근데 분위기가 묘하던데, 너 무슨 일 있니?”

“미안. 나중에 이야기하자.”

태주는 노골적인 호기심을 드러내며 이것저것 캐묻는 민석을 뒤로하고, 동숭동 카페거리로 달려갔다. 숨바꼭질하듯 은서가 몸을 피한 카페를 찾아 헤매는 동안, 힘겹게 참고 있던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폭발하기 일보 직전, 그의 광기 서린 눈이 은서를 찾아냈을 때, 그녀는 승우 선배와 마주 앉아 만개한 꽃같이 웃고 있었다.

태주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무작정 그녀를 끌고 나와 택시를 탔다. 은서의 저항이 거셌다. 호기롭게 택시를 탔으나 태주는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잔뜩 흥분해서 맹수처럼 발톱을 세우고 태주를 물고 뜯는 은서를 달래느라, 행선지를 묻는 택시기사의 물음에 답하느라, 혼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일단 자취집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택시 안에서 은서의 공격은 거세지고 거칠어졌다. 승우 선배를 핑계로 그의 치졸함과 자격지심, 열등감을 낱낱이 들춰내며 그를 코너로 몰았다. 순간순간 치미는 화를 참으며 태주는 이성을 잃고 날뛰는 그녀를 달랬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그녀를 다독였다.

은서의 흥분은 택시에서 내려서까지도 가라앉지 않았다. 성난 사자처럼 골목이 떠나가도록 으르렁댔다. 태주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러다 뇌관이 터지듯 잠재되어 있던 그의 못된 성질이 폭발해 버릴 것 같았다. 폭군처럼 포악한 말을 쏟아낼 것 같았다. 어서 정지 버튼을 눌러야 했다. 그는 왈칵 은서를 담벼락으로 밀어붙였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은서가 반격을 가할 틈 없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막았다. 짧은 순간, 그녀의 숨결이 그의 몸 안으로 몰려들었다.

의외였다. 잔뜩 독이 올라 그를 밀쳐낼 줄 알았는데, 기다렸다는 듯, 온몸의 기를 빨아들이듯, 은서가 돌진해왔다. 정신이 몽롱해졌다. 눈앞이 하얘졌다가 새까매지며 끝 모를 암흑 속으로 빠져든 느낌이었다. 만년설이 녹아 산사태가 나고, 집채보다 큰 파도가 그를 덮치는 느낌이 이럴까. 화산이 폭발하고 마그마가 분출하는 것 같기도 했다. 길고 격정적인 키스가 끝났을 때, 그는 탈진해서 쓰러질 것 같았다. 그의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넋 나간 피에로처럼 멍해진 그를 힐끗거리던 그녀가 시니컬한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작고 낮은 그녀의 웃음소리가 점점 고도를 높이며, 쌉싸름한 밤공기를 가르며, 골목을 떠돌았다.

“그만해.”

깔깔거리는 그녀의 웃음소리가 더 높아졌다.

“그만 좀 하라니까!”

민망해진 그가 그녀의 어깨를 와락 붙잡았다. 가로등 아래 드러난 그녀의 눈이 울고 있었다.

“은서야……”

“날 가져. 태주야, 어서.”

그녀가 뜨겁게 속삭이며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 한마디에 정신이 몽롱해져 미친 듯이 그녀의 입술을 헤집었다. 물컹하고 뜨끈한 무언가가 그의 몸을 타고 흘렀다. 어떻게 자취방으로 들어섰는지, 어떻게 서툰 몸놀림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본능에 의지하기에 부족한 것이 많아 어색한 행위였다. 그렇게 그는 초라하고 남루한 그의 자취방에서 허겁지겁 그녀를 안았다. 절정의 순간 머릿속에서 환희의 불꽃이 터졌고, 정신을 잃었다. 부끄러운 첫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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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주가 계산을 하는 사이, 은서가 금발 미남과 춤을 추기 시작한다.

끈적거리는 재즈 선율에 따라 자연스럽게 몸을 부딪치며 그들의 시선이 엉킨다. 그들을 바라보는 태주의 마음이 뒤틀린다. 춤을 추는 동안 그녀는 금발에게 눈을 떼지 못한다. 그녀의 눈동자가 촉촉해진다. 끈끈한 선율이 두 사람의 몸 사이를 흐르고, 두 사람의 몸이 떨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지는 춤사위 속에서 그들의 호흡이 가빠진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들을 방관하던 태주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랐다. 더는 봐줄 수 없다. 그의 눈에서 스파크가 튄다. 이럴 수는 없는 거다. 아무리 그녀가 다른 삶을 살았더라도, 그녀의 영혼에 스며든 프랑스 정서를 이해해야 한다 하더라도, 너무 많이 마신 와인 때문에 그녀가 취한 것이라고 자조해도,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미로를 헤매듯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무시당한 사랑의 상처가 너무 가혹해 가슴이 찢어질 것 같다. 온몸의 근육이 난자당하는 고통을 느끼며 태주는 음악에 젖어 흐느적거리는 은서에게로 달려든다. 사납게 그녀의 손을 낚아채며 꿀꺽 화를 억누른다.

“이게 무슨 짓이야?”

갑작스러운 그의 몸짓에 저항하는 은서의 눈빛이 날카롭다.

“너야 말로 무슨 짓이야 이게?”

터지기 일보 직전의 풍선처럼 은서를 노려보는 그의 표정이 위태롭다. 그 위세에 눌린 그녀가 잠시 멈칫하는 사이 태주가 그녀를 끌고 레스토랑을 나선다. 이거 놔, 이거 놓지 못해? 그녀가 반항하듯 소리친다. 거칠게 뿌리치는 은서의 팔을 더 세게 그러잡고 그는 주차장으로 향한다. 주차장으로 끌려가는 그녀가 발악하듯 소리친다. 차오르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나머지 손으로 그의 등을 때린다. 온 힘을 다해 죽어라, 휘두르는 그녀의 매운 주먹을 고스란히 맞으며 태주의 발걸음이 주차장에 다다른다.

주차장으로 들어선 태주가 비로소 안심한 듯 홱 몸을 돌려 그녀의 양팔을 포박하며 잡는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그를 쏘아보는 눈빛에 한기가 서려있다. 입술을 앙다물더니 그에게 발길질을 해대기 시작한다. 그녀를 막아서던 태주가 휘청거릴 정도로 거센 공격이다.

“가만히 좀 있어.”

발길질을 피하느라 엉거주춤하던 태주가 그녀를 놓친다. 그물을 벗어난 고기처럼 자유로워진 그녀의 반격이 이어진다. 가녀린 체구에서 품어져 나오는 힘이 엄청나다. 싸움닭처럼 사납게 달려든 그녀가 그를 마구 때리기 시작한다. 그녀를 막아서는 일이 버겁다. 은서와 몸싸움을 벌이던 그는 미친 말처럼 날뛰는 그녀를 어찌하지 못하고 와락 끌어안는다.

그녀를 가슴에 품자, 달콤한 와인 향기가 훅 풍긴다. 아찔한 그 향기가 페로몬처럼 그를 자극한다. 유혹의 손길이 그의 깊숙하고 축축한 곳으로 파고든다. 그녀의 반항이 거셀수록 그의 가슴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온몸을 결박하듯 그녀를 끌어안은 태주는 향기의 근원을 찾아 미친 듯이 그녀의 입술을 더듬기 시작한다.

그를 사납게 밀어내고 거칠게 할퀴어 댈 것 같던 그녀가, 그녀의 입술이 화르르 달아오른다. 의외다. 데자뷔처럼 익숙한 느낌이다. 아, 초콜릿 퐁듀처럼 뜨겁고 달콤한 그녀의 입술에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태주는 미친 듯이 숨을 헐떡인다.

몸 안 구석구석 기가 빠져나가 흐물흐물해지는 것 같은 격정적인 키스가 끝나자, 은서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린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태주가 놀란 토끼처럼 그녀를 바라본다. 서늘한 밤공기를 타고 은서의 고혹적인 웃음소리가 퍼져나간다. 번개에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든다.

아, 그녀에게 또 휘둘렸다. 옛날, 그의 자취집 골목에서 그랬던 것처럼 팜므파탈 같은 저 웃음소리가 또 그를 비웃고 있다. 허탈해진 태주는 으스러지게 입술을 깨물며 은서를 쏘아본다. 당장 그녀를 안고 싶어 미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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