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너라서 사랑했어, 태주야.
은서의 꿈은 소박했다. 태주를 사랑하고부터 유학의 꿈도 버렸다. 졸업 후에 선배들처럼 프랑스계 은행에 취직해서 돈을 벌며 태주가 자리 잡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청혼을 받은 것도 아니고 구체적인 결혼 계획도 없었으나,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듯 사랑하니까 당연히 그와 결혼할 거라고 믿었다.
사소한 다툼이 이별이 될 줄 몰랐다. 생각과 습관이 달라서 사사건건 싸웠지만 싸우고 돌아서면 보고 싶은 얼굴이 태주였다. 은서가 고약하게 성질을 부리며 헤어지자고 악을 써도 그는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꿋꿋하게 사랑을 지켜내던 남자였다. 은서의 화를 풀어주고자, 그녀의 집 앞에서 벌을 서듯 밤을 새우기도 했었다. 그 사랑을 믿고 은서는 오만방자하게 만용을 부리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그날, 웬일인지 태주가 그녀를 피했다. 그런 그를 오기로 찾아갔다가 또 싸우고 말았다. 독한 말을 잔뜩 뱉어냈던 것 같다. 돌이켜보니, 태주가 헤어지자고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단호한 그의 눈이 이별을 원하고 있었다. 기막히고 화가 나서 자존심의 발톱을 잔뜩 치켜세웠다. 평소처럼 그가 백기를 들고 돌아올 거라 믿으며 남프랑스 지방을 강타하던 미스트랄보다 더 강하고 차가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런데 일주일, 이 주일이 지나도록 태주가 보이지 않았다. 죄인처럼 납작 엎드려 그녀의 화를 풀어주고 달래주어야 할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늦은 밤, 2층 창문으로 몰래 집 밖을 살펴보았으나 그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스친 은서는 허겁지겁 태주를 찾아 나섰다가, 텅 빈 그의 자취방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아니, 짝꿍처럼 붙어 다니더니 남자 친구가 군대 간 것도 몰랐어?”
주인집 아주머니가 안쓰러운 얼굴로 은서를 바라보았다.
“혹시, 고향 집이 어딘지 아세요? 전화번호라도……”
“글쎄, 청주 어디라고 했는데, 전화번호는 나도 모르지.”
인사를 하고 돌아서던 은서의 뒤통수가 따가웠다. 한두 해 사귄 것도 아니면서 남자 친구 고향 집도 모른다고 아주머니가 혼잣말처럼 끌끌거렸다. 그녀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이럴 때 민석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도 지난달에 입대해서 연락이 안 됐다. 답답했다. 한동안 망연자실 그렇게 앉아 있다가 은서는 겨우 태주네 학교 과사무실을 떠올렸다.
“우리 태주 군대 갔는데, 누구신가요?”
어렵게 청주로 전화를 걸었던 은서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정말이었다. 헤어지자는 말과 함께 돌아선 그가 정말 사라졌다. 허망해진 그녀는 들고 있던 수화기의 무게조차 견딜 수 없었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듯 몸을 가눌 수 없었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이럴 수 없었다. 이렇게 헤어질 수 없었다. 어떻게 사랑을 썩은 무 잘라내듯 단칼에 베여버릴 수 있는지. 태주를, 그의 매정함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군대로 숨어버린 그를 찾아낼 일이 막막했고, 동시에 그의 비겁함에 분노가 치밀었다. 이별을 인정하는 일은 더 힘들었다. 습관처럼 태주의 기억이 그녀를 따라다녔다. 그와 함께했던 순간들, 그와 함께 나누던 이야기들이 날 선 비수처럼 그녀를 가격했다. 매일 마음 안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그를 미워하고 증오하다가 그리워하고 눈물짓는 지겨운 일상이 반복됐다.
시련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그녀를 일으켜 세운 건 아버지였다. 엇갈린 인연을 훌훌 털어버리라며, 아버지는 딸의 유학을 서둘렀다. 그렇게 은서는 등 떠밀리듯 서울을 떠나 파리로 왔다.
짧은 순간 태주와 헤어지던 아픈 기억이 은서를 급습한다.
왜 나를 좋아했느냐, 고 묻는 태주의 어눌한 질문에 우울했던 과거가 그녀를 헤집어 놓았다. 은서는 애써 침울한 기억을 털어내며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달리 할 말이 없다. 그냥 사랑했다는 말밖에. 그를 사랑하던 매 순간이 행복했는데,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하겠는가. 태주의 표정이 아련해진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몽롱해지며 입가에 잔잔하게 미소가 떠오르는, 스무 살의 은서가 좋아하던 표정이다.
순례길을 내려오던 은서는 숨 막힐 듯 아름다운 마을 풍경과 마주친다. 초록 나무 사이로 드러난 지붕들이 클레오파트라 입술처럼 붉고 아름답다. 풍경보다 마을이 간직한 역사와 이야기에 더 관심을 보이던 태주의 입에서도 감탄이 흘러나온다. 바로 지금이다. 지금 이 풍경을 마음에 담듯 그림으로 남겨야 한다. 그의 손에서 스케치북을 낚아챈 은서가 거침없이 마을 풍경을 그려내기 시작한다.
“그림은 언제부터 그렸어?”
그림 속으로 빠져든 그녀를 카메라에 담으며 태주가 묻는다.
“유학 와서 진로를 바꿨으니까, 20년도 넘었지. 기억 안 나?”
“뭐가?”
“네가 그랬잖아. 가슴이 뛰는 일을 하라고.”
처음 태주에게 그 말을 듣던 순간, 은서는 감전된 듯 꼼짝할 수 없었다. 가슴이 뛰는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고 경험도 못 했던 일이었다. 그녀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날부터 은서는 숙제처럼 그 일을 생각했다. 태주를 사랑하는 일 말고 특별히 그녀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없을 때였다. 가슴이 뛰는 일을 찾은 건 파리에서였다. 센 강가를 걷다가 누군가 세워둔 이젤에 놓인 그림을 본 순간, 그녀의 가슴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녀에게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달콤한 디저트를 발견한 아이처럼 신나고 들뜬 목소리였다.
“이런, 내 그림이 또 누군가의 마음을 훔쳤군요.”
그림을 그리는 건축학도 줄리앙이었다. 은서는 줄리앙과 그림을 번갈아 보았다. 푸른 바다를 연상시키는 눈동자에 단정하게 자른 밝은 갈색 머리, 가벼운 듯 보이지만 어딘지 깊이가 느껴지는 얼굴이 이젤에 놓인 그림과 묘하게 닮아 보였다.
“내 그림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인데…… 좋아요. 인심 팍 썼다. 커피 한 잔에 내 그림 이야기를 팔게요. 아, 참고로 저 굉장히 바쁜 사람입니다. 솔직히, 당신이 예뻐서 기회를 드리는 거고요.”
줄리앙의 너스레에 미소 짓던 은서는 홀린 듯 그를 따라 카페로 갔다. 그의 그림 이야기는 날이 저물도록 이어졌고, 그들은 밤늦도록 와인을 마시며 서로의 거리를 단숨에 좁혀 나갔다. 줄리앙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은서에게 화실을 소개해 주었고, 그녀가 언어학 석사과정을 그만두고 미술대학에 편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그의 그림에 가슴이 뛰고 마음이 끌렸던 은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림보다 그림의 주인에게 더 마음을 빼앗겼다.
사랑의 상처는 새로운 사랑으로 치유된다는 말이 맞았다. 줄리앙에게 빠져들면서 은서는 태주와의 이별을 인정했다. 태주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지울 수 없었지만, 그로 인해 비롯된 인생의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을로 내려온 은서는 길 양옆으로 늘어선 부티크를 바라보며 환호한다. 성스러운 순례지라고 생각했던 이곳이 마을로 내려온 순간 아기자기하고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애니메이션 영화처럼 느껴진다. 평일인데도 마을의 길들은 알록달록 화려한 옷을 입은 관광객들로 바글거린다. 기념품 가게에서 만난 물건들도 특이하다. 작고 소박한 물건 하나하나가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미술관에서 진귀한 작품을 만난 것과 또 다른 감흥. 마을의 무명 아티스트들이 빚어낸 예술작품이 건조한 그녀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뭘 살 건데?”
고요한 호수에 돌을 던지듯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감성을 깨트린다. 은서 주위를 맴돌던 태주가 불쑥 끼어들었다.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지만,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있다. 온몸의 솜털이 일어나듯 그녀의 신경이 곤두선다. 왈칵 솟구치는 신경질을 애써 참으며 그를 달랜다.
“미안. 지루하면 저기 카페에 가서 기다릴래?”
마지못해 부티크를 나가는 태주의 굳어진 얼굴이 보인다. 은서의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의 눈치를 보고 있는 자신이 왜소해 보인다. 왜 좋아하는 쇼핑을 하면서 그의 기색을 살펴야 하는지 모르겠다. 스멀스멀 화도 올라온다. 줄리앙과 함께였다면 이런 스트레스는 없었다. 줄리앙은 쇼핑을 좋아했다. 특히 여행지에서의 쇼핑은 추억을 사는 소중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간혹 그녀의 쇼핑이 길어지면 카페에서 몇 시간이고 기다려주기도 했다. 태주가 부티크를 나가고부터 그녀의 마음이 바빠진다. 싫다. 무언가에 쫓기는 느낌이 정말 싫다. 콩크와 피지악에서 태주가 하도 서두르는 통에 부티크 근처도 못 갔는데, 겨우 들어온 로카마두르 기념품 가게에서 조차 허둥거리다니. 태주와 첫 여행을 기념할 선물을 사고 싶은데 자꾸 바빠지는 마음 탓에 무엇을 사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다. 은서의 불안한 손길이 나무로 만든 모빌과 풍경을 만지작거린다. 색이 화려하고 소리가 맑은 나무 풍경을 선택한다. 정성스레 나무 풍경을 포장하는 주인을 바라보며 은서는 애써 차분하게 마음을 다독인다.
카페로 들어선 은서가 웨이터에게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며 자리에 앉는다. 예상대로 태주의 표정이 시무룩하다. 터져 나오는 불만을 억누르느라 지친 얼굴이다. 은서의 마음도 우울한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녀는 툭 던지듯 선물상자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스케치북을 집어 든다.
“뭐야? 한 시간 동안 겨우 이거 하나 샀어?”
스케치하려던 은서의 손이 굳어진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꼬리가 올라간다.
“미안한데, 나, 그림 좀 그릴게.”
낮고 정중한 그녀의 말에 그가 당황한다.
“어? 농담한 건데, 화났어?”
잔뜩 풀 죽은 목소리에 마음이 흔들린다. 슬쩍 그녀의 눈치를 보는 태주가 의붓자식처럼 가련해 보인다. 순간, 샐쭉했던 은서가 말랑말랑한 두부처럼 약해진다. 그래, 여행 첫날부터 이렇게 삐걱거리면 안 된다. 그러면 앞으로 그와 함께할 수많은 날을 견뎌내기 힘들 거다. 시간과 더불어 변해버린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은서는 스케치북을 닫으며 태주를 바라본다.
“우리, 석양이 잘 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가자.”
“그래. 석양을 보고 나서 서둘러야 할 거야. 호텔까지 한 시간은 가야 하거든.”
맞다. 이곳이 오늘 여정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다. 애써 마음을 다잡았던 은서는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삼키느라 미간을 찡그린다. 진한 에스프레소로 겨우 마음을 달래며 카페를 나와 구시가지 마을로 올라가는 하얀색 꼬마 관광열차를 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