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첫날밤의 기억
어느 순간부터 은서는 숨이 막혔다. 오래된 그의 가난과 쫀쫀하고 답답한 공대생 기질이 그녀를 압박했다. 지나간 시간과 함께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나쁜 기억이, 양파 껍질 벗겨지듯 드러나는 그의 단점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레스토랑에서 은서는 연인들의 저녁 식사를 기대했다. 쇼핑을 방해받은 앙금을 털어내고, 태주와 석양을 바라보며 로맨틱한 시간을 갖고 싶었다. 여행을 함께 와준 그에게 저녁을 사며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땅딸보 남자가 메뉴판을 가져온 순간, 그녀의 부푼 기대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시들해졌다.
어휴, 뭐가 이렇게 비싸. 태주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메뉴를 들여다보며 입술을 달싹여 혼잣말처럼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지 말았어야 했다.
그 소리를 신호로 그녀의 기분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음식 가격 때문에 불만으로 가득 해지는 태주의 표정은 그녀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이제 막 행복의 문을 열었는데, 미련을 버리지 못한 불행이 고개를 내밀고 약을 올리는 것 같았다. 박사학위를 받고 프랑스 유명 연구소의 잘 나가는 연구원이 됐어도, 그의 마음은 아직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태주가 안쓰럽고 가여워 은서는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거기까지는 참을 만했다. 밥을 먹는 내내 그는 요리가 느끼하다, 간이 짜다 하면서 불평을 쏟아냈다. 그의 투덜거림 탓에 페리고르 지방 최고 요리가 싸구려 삼류 요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온종일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던 그녀는 잔칫상을 앞에 두고 배탈이 난 사람처럼 약이 올랐다. 억지로 음식에 대한 예의를 지키느라 애쓰며 죄 없는 쌩테밀리옹 와인만 마셨다. 더 화가 나는 건, 이런 그녀의 불만을 말할 수 없다는 거였다. 왜 자꾸 그의 눈치를 보게 되는지,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는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 없었다.
다행히 그를 무장해제시킬 기회가 왔다. 줄리앙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그녀 옆으로 자리했다. 깍듯한 예의와 넘치는 유머 감각으로 여자의 마음을 훔치겠다는 자신감이 가득한 남자. 게다가 잘생기기까지 한 남자가 그녀에게 슬쩍슬쩍 호감의 눈빛을 보냈다. 태주도 상황을 눈치챈 것 같았다. 은서는 프랑스 금발 미남을 노려보는 태주의 눈빛에서 희망을 읽었다.
바보처럼 태주는 잘도 넘어왔다. 비로소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고, 알에서 나온 새처럼 그는 주차장에서 딴사람이 됐다. 광폭한 그의 키스가 그녀의 마음으로 들어왔다. 스무 살 시절의 그를 다시 만난 것 같은 황홀함에 젖기도 했다. 투우사를 향해 돌진하는 황소처럼 그녀를 향하는 그가 귀여워 미칠 것 같았다. 은서는 행복에 겨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서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호텔로 향하는 차 안에서 그들은 철부지 연인처럼 서로를 유혹했다. 태주는 몇 번이고 갓길에 차를 세우고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왜, 이렇게 호텔을 멀리 잡았어? 은서가 부드러운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음미하듯 그의 입술을 핥으며 투정을 부렸다.
여기가 어디지? 설핏 잠에서 깨어난 은서는 혼란스럽다. 멍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곤히 잠든 태주가 보인다. 이제야 생각난다. 정신을 차린 은서는 반쯤 몸을 일으키고 앉아 그를 바라본다. 조각상처럼 반듯한 그의 콧날에 살짝 입을 맞추고 싶어 진다.
우울을 털어내려고 마신 와인이 과했나 보다. 어젯밤의 기억이 가물거린다. 어떻게 호텔로 왔는지, 샤워는 했는지, 뭉툭 뭉툭 잘려나간 기억들이 퍼즐 조각처럼 흩어진다. 침대를 빠져나오던 은서가 멈칫거린다. 그녀의 몸에 남아있는 사랑의 흔적이 어젯밤의 기억을 불러온다. 뜨거운 사우나를 즐기다가 차가운 북해로 뛰어드는 것 같던 전율, 심장이 터질 것 같은 흥분이 온몸을 휘감던 순간의 짜릿함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섹스가 끝난 후, 바로 코를 골고 잠들었던 줄리앙과 달리 그와의 섹스는 진정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었다. 첫 경험도 이렇게 사랑스러웠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은서는 가볍게 한숨을 쉰다. 새삼 미숙했던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완벽한 결합을 꿈꾼다. 사랑이 깊어진 후에는 처음 손을 잡을 때의 떨림 같은 두근거림을 그리워한다. 마음을 담아 몸으로 표현하던 깊은 입맞춤,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자꾸 연인을 자극한다.
그 시절, 은서와 태주는 사랑의 결핍에 시달렸다. 장애물에 막혀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짐승처럼 그들은 답답한 가슴을 떨었다. 그녀를 데려다주던 길, 담장 밑에서 나누던 짧은 키스는 아쉬운 미련만 남겼다. 넘어야 할 고지를 두고 돌아서는 병사처럼 전의를 잃고 방황했다. 태주의 입에서는 항상 신음 같은 고통이 흘러나왔다. 돌아서 가는 그의 쓸쓸한 등을 바라보는 은서의 가슴에도 눈물이 흘렀다.
그의 자취방에서 나누던 키스는 종종 위험수위를 넘나들었다. 그는 은서의 가슴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다가 제풀에 쓰러졌다. 그녀를 지켜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태주를 짓눌렀다. 책임감이 강한 그의 성격 탓도 있었다. 은서 역시 순결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나 그녀는 태주의 인내심이 고마우면서도 답답했다. 그를 사랑하는 무게만큼 순결이라는 족쇄를 벗어버리고 싶은데, 그녀도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가끔 태주가 무모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를 도발하고 싶어 졌다.
3학년 여름방학이 고비였다. 태주를 못마땅해하던 아버지가 승우 선배를 사윗감으로 점찍고 물밑 작업을 시작했다. 아버지 거래처 윤 사장이 은서를 며느릿감으로 탐냈는데, 알고 보니 동아리 승우 선배의 아버지였다. 이런 우연이 다 있느냐며 양가 어른들끼리 죽이 척척 맞았다. 건축과 복학생이던 승우 선배는 졸업과 동시에 마르세유에 있는 유명 건축과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날 예정이었다. 어른들은 둘을 결혼시키고 함께 프랑스로 유학 보내자고 의기투합했다.
양가 어른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승우 선배가 다가왔다. 은서는 선배에 대한 예의만 깍듯하게 지켰다. 거절의 뜻이었다. 그는 태주를 만나는 자리까지 따라 나왔다. 선배 노릇을 하며 은근히 재력을 과시했다. 은서는 콧방귀를 뀌었으나 태주는 달랐다. 가난한 그의 자존심을 자극한 것이다. 동갑에 은서보다 학년도 아래인 태주는 자존심을 강탈당한 것처럼 자격지심에 시달렸다. 자칫하다 승우 선배에게 은서를 뺏길 것 같은 불안감에 매사가 삐딱해졌다.
불안한 건 은서도 마찬가지였다. 태주와의 미래가 너무 멀고 막막했다. 탄탄대로 같을 승우 선배와의 앞날이 그녀를 유혹했다. 은서는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잡고 싶었다. 승우 선배와의 장밋빛 인생에 미련을 두지 않도록, 그녀의 사랑을 배신하지 않도록, 확신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유치하게 그를 자극했고, 짜릿하고 뜨겁게 그를 도발했다.
허무했다. 그녀가 꿈꾸던 완벽한 결합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태주를 사랑한 거라고, 어쨌든 그의 여자가 되었노라고 자위해도 소용없었다. 아프고 허망한 첫 경험은 여름날의 악몽 같았다. 은서는 새벽같이 태주의 자취방을 나와 양평 이모네로 내려갔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이모가 차려준 점심을 먹자마자 손님방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끝없이 이어진 길을 걸으며 하염없이 울었다. 발은 부르터 물집이 잡혔고, 눈에서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눈물이 흘렀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베개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열린 커튼 사이로 여린 새벽이 밝아왔다. 은서는 주섬주섬 일어나 마당으로 나왔다. 새벽 공기가 기분 좋게 촉촉했다. 이모 집을 나와 연못으로 향하는 산책로로 접어들었다. 심술 난 아이처럼 타박타박 발소리를 내며 걷다가, 사랑과 섹스의 간격이 공허해서 잠깐 울었던 것 같다. 아직 그녀의 몸에 남아있는 뻐근한 통증이 그녀를 더 슬프게 했다. 서툰 그의 손길이 그녀의 몸에 남긴 상처도 아팠다. 가슴 떨리던 첫 경험이 아픈 기억으로 물들 줄 정말 몰랐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는데, 무책임한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은서는 하염없이 연못을 바라보며 태주와 함께 할 날들을 그려보았다. 지금처럼 사랑하고 싸우고, 또 사랑하고 실망하고, 더 사랑하고 웃고 울고 미워하고 지겹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그의 아이를 낳고 그의 속옷을 빨며 사는 미래를 상상했던 것 같다.
그때, 희미한 새벽의 침묵을 깨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들렸다. 눈앞에서 연꽃 봉우리들이 툭툭 터지며 피어오르는 소리. 아기가 잠에서 깨어나듯 하나둘 연꽃이 피어나는 소리에 은서는 싱그레 웃음을 짓다가 눈물을 흘렸다. 이상하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그랬을까.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벽을 허물면 넘나드는 일이 쉬워진다. 청춘의 끓는 피를 억제하지 못한 태주는 수시로 그녀를 안고 싶어 했다. 은서는 그런 그를 거절할 수 없었다. 의무감 같은 잠자리가 이어졌다. 여전히 서툴고 불안한 섹스였다. 결국, 의무적인 잠자리는 부작용으로 이어졌다. 분명 피임을 했는데, 생리가 끊겼다. 임신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렸다. 애달아 속 태우기를 이십 여일. 불안한 얼굴로 태주와 산부인과 앞을 서성이던 날, 다행히 생리가 터졌다.
“이제, 다시는 너랑 안 잘 거야.”
그날, 은서는 태주의 가슴을 때리며 울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다시는 널 힘들게 안 할게.”
착한 남자 태주는 그날로 모든 욕망을 끊어버렸다. 키스는 물론이고 가벼운 입맞춤도 피했다. 가끔 은서가 철부지처럼 입술을 내밀다가 무안을 당하기도 했다. 사소한 갈등이 계속되면서 섭섭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을 만들었다. 은서는 몰랐다. 이 작은 균열이 이별이라는 파멸을 초래할 줄을.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태주가 일어나 있다.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띠며 다가와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는다. 끙끙거리며 엄마 냄새를 맡는 아기처럼,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애무한다. 쫀득하고 말랑한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귓불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고, 그녀의 가늘고 긴 목을 간질이기 시작한다. 그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머리가 몽롱해진다. 태주의 입에서도 들릴 듯 말 듯 애처로운 신음이 흐른다. 그녀를 침대로 이끌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보인다. 은서도 그러고 싶다. 오늘 하루는 호텔에서 쉬면서 안락하고 따뜻한 시간을 즐기고 싶다.
1년 전, 파리에서 보낸 태주와의 밤은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다. 어젯밤도 좋았다. 대학 시절부터 꿈꾸던 완벽한 결합을 비로소 이룬 기분이다. 운명의 짝을 만난 것처럼 설레고 황홀했다. 이제, 다시는 태주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 고 은서는 다짐한다.
“배고프지? 아침 먹자.”
다정한 그의 목소리가 식욕을 자극한다. 오늘은 바게트에 버터 대신 쫀득하고 달콤한 누텔라를 잔뜩 발라 먹고 싶다. 진한 에스프레소와 어울리는 달콤한 무화과잼도 좋겠다. 그녀는 얼른 옷을 갈아입으며 호텔 식당으로 갈 준비를 서두른다. 하룻밤 사이에 수염이 더불 더불 자란 태주가 부스럭거리며 가방을 뒤진다. 갈아입을 옷을 찾는가 싶었는데 컵라면과 생수를 꺼낸다. 저건 또 뭐지?
은서가 찻잔만큼 커진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