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페리고르-
11장 우리는 얼마나 사랑하는 걸까?

by 소심한 삘릴리

11. 우리는 얼마나 사랑하는 걸까?

은서에게서 라벤더 향이 난다. 보랏빛 라벤더 꽃물결이 밀려오듯 달큼한 사랑이 그녀에게서 풍겨온다. 어젯밤의 아련한 기억이 태주를 감싼다. 이대로 그녀를 안고 싶은 유혹이 그를 자극한다. 동시에 프랑스 선사시대의 흔적을 찾아보고 싶었던 그의 작은 소망과 라스코 동굴이 그의 발목을 잡는다. 아,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여행을 떠올리자 늘 그렇듯 태주의 마음이 바빠진다. 오늘 일정도 어제 못지않다. 고양이 손을 빌려야 할 정도로 아니 번갯불에 콩을 구워야 할 정도로 바쁠 것 같다. 그녀와의 첫 여행이다. 얼마나 많은 날들을 돌고 돌아서야 이 순간을 맞이할 수 있었는지, 그녀와 함께 하는 순간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기억해야 한다. 여행이 풍성한 이야기로 남을 수 있도록, 두고두고 곱씹을 소중한 추억이 되도록, 이번 여행의 순간순간을 알차게 꾸며야 한다. 그러니 어서 아침을 먹고 호텔을 나서야 한다.

바쁜 마음을 앞세우며 가방에서 컵라면을 꺼내는 태주의 뒤통수가 따갑다. 고개를 돌리자 은서가 그를 낯선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놀란 표정 같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 같기도 한 시선. 백만 광년은 떨어진 곳에서 날아든 것 같은 그 시선에 태주가 움찔한다. 컵라면을 꺼내는 손이 부끄럽기는 처음이다.

여행을 다니는 동안 태주는 컵라면으로 아침을 먹을 때가 많았다. 느끼한 호텔식 아침 식사보다 개운하게 속을 풀어주는 컵라면이 백배쯤 좋았다. 태주가 온종일 현지 음식을 먹어야 하는 외국여행을 견딜 수 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모두 컵라면 덕이었다. 그런데 황당함을 감추려 애쓰는 은서의 눈빛이 컵라면을 낯선 침입자 취급을 하고 있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어색함이 그들 사이로 파고든다.

“그게 뭐야?”

“으응. 컵라면. 아침으로 먹으려고……”

“아침에 라면을 먹는다고?”

“응. 너, 옛날에 라면 좋아했잖아.”

뚝, 대화가 끊기듯 은서가 암묵 속으로 빠져든다. 뭐지 이 어색함은? 주눅이 든 아이처럼 그는 그녀의 눈치를 본다. 샐쭉해져서 입술을 앙다무는 그녀가 몹시 신경 쓰인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갈등하던 그는 질끈 눈을 감는다. 에잇, 모르겠다. 서둘러 생수를 전기주전자에 붓고 물을 끓이기 시작한다. 방황하는 영혼처럼 시무룩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흐른다.

“어제 먹은 푸아그라가 느끼해서 그래.”

탁 소리와 함께 전기주전자가 물 끓이기를 마치자, 태주가 변명처럼 중얼거린다. 컵라면에 끓인 물을 붓는 그의 손이 살짝 떨린다. 여전히 입술을 앙다물고 있던 은서가 희망을 포기한 수녀 같은 얼굴로 컵라면을 제 앞으로 가져간다. 태주도 컵라면에 물을 붓고, 어색하게 중얼거린다. 맛있겠다. 머뭇거리던 그녀가 라면 한 젓가락을 입으로 가져간다. 잠시 후 표정이 발그레 피어나는 꽃처럼 환해진다. 다행이다. 태주는 그녀의 얼굴에 스미는 미소를 확인하고 나서야 컵라면을 먹기 시작한다. 어제부터 간간이 메슥거리던 속이 후루루 풀리는 기분이다.

“나, 프랑스 와서 라면 끊었는데…… 맛있다.”

샐쭉했던 마음이 풀렸는지 은서의 입가에 수줍은 미소가 스민다. 오랜만에 먹는 라면이 맛있다며 후루룩 후루룩 잘도 먹는다. 프랑스에 와서 라면을 끊었다고? 태주는 은서의 말이 목에 걸린다. 파리에 있는 한국식품점은 물론이고 중국 가게에서도 손쉽게 라면을 살 수 있을 텐데, 왜 프랑스에 와서 라면을 끊었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라면을 끊었는데? 혹시 라면 먹고 체했어?”

“체하는 건, 맨 날 그랬지.”

무심코 튀어나온 말에 은서가 흠칫한다. 슬쩍 태주의 눈치를 살피더니 말없이 라면을 먹는다. 순간, 태주의 목울대로 우르르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이제야 퍼즐 조각을 맞추듯 기억이 되살아난다. 라면을 먹고 나서 은서는 항상 소화제를 먹었다. 사흘은 굶은 사람처럼 국물까지 싹싹 비워놓고, 돌아서면 속이 안 좋다며 쓱쓱 가슴을 문질렀다.

“괜찮아, 내가 원래 잘 체하잖아.”

은서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태주의 걱정 어린 시선을 피했다. 태주는 그를 안심시키려고 한 말을 순진하게 믿었고, 무심하게도 그녀가 라면을 먹은 날에만 체한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왜 그의 기억 속 은서는 라면을 좋아하고, 라면을 맛있게 먹던 모습으로 남았을까. 은서에게 값싼 라면은, 밥값은 꼭 남자가 내야 한다고 고집하는, 태주에 대한 배려였음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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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가 테이블 위에 놓인 일정표를 집어 든다. 짐을 싸던 태주가 살짝 긴장한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얼굴에 파르르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사라진다.

“이렇게 많은 곳을 다 갈 거야? 그러고 싶어?”

다행히 은서의 목소리가 유순하다.

“마음에 안 들어?”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쫓기듯 여행하는 것 같아서.”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많이 보고 많이 돌아다니면 좋잖아.”

“같은 날, 너무 많은 곳을 여행하면 헛갈려서 잘 모르겠더라. 천천히 음미하고 느낄 여유도 없고.”

“난 반대야. 기왕 여행 왔으면 가능한 한 많이 돌아다니며 봐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카페에서 시간 낭비하는 거, 솔직히 마음에 안……”

카페는 언급하지 말았어야 했다. 태주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은서를 본다. 무표정한 채로 한동안 그를 바라보던 은서가 살짝 입술을 비튼다.

“그랬구나. 근데, 우리가 예전에도 이렇게 달랐었나?”

은서의 목소리에 실망이 서린다. 미안해진 태주가 상황을 수습하느라 어쩔 줄 모른다. 여전히 그는 은서 앞에서 작아진다.

“미안. 내 말이 너무 심했지?”

“아니. 생각해보니까, 우리가 서로를 너무 모르는 것 같아.”

“그건 그래.”

“그래서 말인데, 우리 각자 여행 스타일을 존중하면 어떨까?”

“어떻게?”

“예를 들면, 네가 라스코 동굴을 보는 동안 나는 카페에서 너를 기다리는 것.”

그녀를 바라보는 태주의 눈에서 조금 전까지 빛나던 희망이 사라진다.

“라스코 동굴에 안 가겠다고?”

“응.”

“라스코 동굴 벽화가 역사적으로는 물론이고 미술사적으로도 얼마나 큰 가치를 가졌는지 몰라서 그래? 더구나 너처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안 보겠다고?”

“우리가 볼 수 있는 라스코 동굴은 진짜가 아니잖아. 그래서 싫어.”

“라스코Ⅱ는 일반적인 재현 동굴이 아니래.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이용했던 안료와 방식을 그대로 재현해서 후기 빙하기 구석기인들이 남겨 놓은 벽화 그대로를 느낄 수 있다고.”

“어쨌든 재현이지, 오리지널이 아니잖아. 그래서 가기 싫어.”

은서의 표정이 단호하다. 아무리 잡아끌어도 꼼짝도 하지 않을 기세다. 그녀의 기에 눌려 서로의 스타일을 존중하자는 말에 동의를 표하지만, 속마음은 영 찜찜하다. 혼자서 하는 여행에 익숙하지 못한 그는 눈앞이 캄캄하다. 혼자서 어떻게, 서먹한 마음은 또 어떻게 달래며 라스코 동굴을 탐방할지 난감하다. 체크아웃하고 호텔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이 자꾸 느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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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주의 푸조가 베제르 강변을 따라 몽띠냑 마을로 들어선다. 라스코 동굴로 유명한 마을이 관광지답지 않게 수수하고 소박한 풍경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태주는 은서의 손을 잡고 구시가지로 들어선다. 시내에 있는 관광센터에서 라스코 동굴 티켓을 사고 이런저런 정보책자를 구한다. 티켓을 사던 태주가 다시 은서의 마음을 확인한다.

“정말 혼자서 괜찮겠어?”

“괜찮다니까. 저쪽 강가 카페에서 그림 그리고 있을게.”

사실 태주 자신에게 묻고 싶은 말이다. 정말 혼자서도 괜찮은지. 그는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여행’에 떠밀려 은서를 남겨둔 채 혼자 차를 몰고 라스코의 복제 동굴 라스코Ⅱ로 향한다.

동굴 관람은 가이드 투어로 진행된다. 태주는 영어를 하는 가이드를 따라 라스코Ⅱ동굴로 들어선다. 사진이라도 찍어서 은서에게 보여주려고 했는데, 사진 촬영도 금지다. 젠장, 가짜가 진짜 행세를 너무 심하게 한다. 조울증에 걸린 듯 그의 기분이 급격하게 다운된다.

“라스코 동굴은 2만 년에서 1만 5천 년 전, 후기 빙하기의 구석기인들이 벽화를 남겨 놓은 동굴입니다. 1940년에 우연히 이 마을 청소년에게 발견돼서 세상에 나왔지요. 그리고 8년 뒤에 일반에 개방되었으나 방문자들의 열기로 벽화가 손상됐습니다.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1963년에 동굴을 폐쇄하고 그 후 20년 동안, 라스코 동굴의 형태와 벽화를 완벽하게 재현한 라스코Ⅱ 동굴을 만들어 1983년부터 일반인들에게 개장하고 있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동굴로 들어가는 관람객들의 표정이 진지하다.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짜를 보고자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이다. 역동적인 느낌이 살아있는 벽화를 보는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진짜와 똑같은 가짜에 감동하는 순간,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그가 살고 있는 현재도 어쩌면 진짜와 똑같은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우울한 혼란이 다가온다.

“모두 뒤를 돌아보세요.”

출구를 나서기 전, 가이드의 요구대로 뒤로 돌아서서 동굴을 바라본다. 동굴 전체가 하나의 예술품처럼 빛을 발한다. 마치 2만 년 전의 삶이 그를 배웅하는 느낌이다. 어쩌면 그가 살았을지 모를 진짜 삶이 저곳에 존재할지 모르겠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그리움이 솟는다. 은서와 헤어져 있던 짧은 시간이 영겁의 세월 같다. 아, 미치도록 그녀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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