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따로 또 같이 여행하다
라면은 가난한 연애의 초상이었다. 태주의 학교 앞 식당에서 먹던 김치찌개가 애틋한 추억이었다면 라면은 상처였다. 은서는 라면을 먹고 나면 꼭 체했다. 소화제를 먹고, 쓰린 속을 달래며 다음에는 라면을 먹지 말아야지 했지만, 막상 메뉴판에 쓰인 음식 가격을 보고 나면 마음이 약해졌다. 가난이라는 자격지심 때문일까. 태주는 절대 은서의 돈을 쓰지 않았다. 은서가 용돈을 받았다며 지갑을 열어도 소용없었다. 가난한 애인의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은서가 선택할 수 있는 음식은 뻔했다. 태주가 큰마음먹고 데려간 레스토랑에서는 오므라이스를 고집했고, 분식집에서는 늘 라면을 주문했다. 라면을 먹을 때도, 일부러 호로록거리며 맛있게 먹었다. 태주가 그녀에게 라면밖에 못 사주는 것을 미안해할까 봐, 맛있게 국물까지 싹싹 비웠다. 태주와 헤어지고 자연스레 라면과 멀어졌다. 한국 음식이 그리울 때도 라면은 떠올리지 않았다.
“어제 먹은 푸아그라가 느끼해서 그래.”
태주의 말에 은서는 마음이 약해져서 컵라면을 제 앞으로 가져온다. 마지못해 집어 든 면발이 뜻밖에 쫄깃하니 맛있다. 얼큰한 국물도 입맛에 맞는다.
“나, 프랑스 와서 라면 끊었는데…… 맛있다.”
괜한 말을 꺼냈다는 후회가 몰려온다. 정말 라면이 맛있어서 한 말이었는데, 라면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을 털어놓은 셈이 됐다. 은서는 시무룩해지는 태주의 안색을 살핀다. 미안한 마음에 더 맛있게 라면을 먹는다. 예전처럼 라면을 먹고 나서 속이 더부룩한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 다행이다.
테이블에 놓인 일정표를 집어 든 순간, 은서는 다시 어제의 악몽에 휘말린다. 오늘도 쫓기 듯 여행을 다니고 싶지 않은 마음에 일정에 대해 불만을 어필한다. 결국, 태주도 카페에서 시간 낭비하는 것이 싫다는 본심을 드러낸다. 은서는 그의 본심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다. 짧은 순간, 수많은 상념이 어지러운 교차로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헤맨다. 확실히 그는 변했다. 예전의 그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은서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태주를 힐끗 쳐다본다. 씁쓸한 배신감과 함께 이제 과거의 그와 결별해야 한다는 현실이 빠르게 다가온다.
카페를 싫어하는 그를 이해하기 힘들다. 동시에 그가 카페를 싫어하는 줄 몰랐던 것이 미안해진다. 그래. 그럴 수 있다. 그녀가 시간의 터널을 지나온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것처럼 그도 그럴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과정이 앞으로 그와 함께해야 할 날들을 위한 초석 일지 모른다. 은서는 마음을 추스르며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한숨처럼 나오는 푸념까지 막지 못한다.
“그랬구나. 우리가 예전에도 이렇게 달랐었나?”
당황하는 태주를 보며 은서는 잠깐 후회한다. 이러려고 여행을 제안한 게 아니다. 타협이 필요하다. 그녀는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자는 자기 생각을 내비친다. 그가 라스코Ⅱ 동굴을 관람하는 동안, 그녀는 몽띠냑 카페에 남아 그림을 그리겠다고.
태주가 라스코Ⅱ 동굴로 떠나자, 안 그래도 조용한 몽띠냑 마을이 더 쓸쓸해진다. 마을로 들어서는 은서의 걸음이 무거워진다. 그를 따라나서지 않은 것이 타야 할 기차를 놓친 것처럼 아쉬워진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 모른다. 라스코 동굴은 미술이 추상적인 형태에서 자연주의적 형태로,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으로 발전되었다는 미술사의 기본 개념을 철저하게 뒤집은 역사적인 현장이다. 그림을 업으로 삼는 그녀가 그곳을 외면하는 것은 직무유기나 자기모순 같은 행위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지금은 그에게 그녀의 취향을 각인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라스코Ⅱ가 복제된 동굴이라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은서는 천천히 마을을 둘러본다. 몽띠냑은 여행지라기보다 복닥거리는 삶이 존재하는 공간 같다. 그녀의 발길이 어른 키보다 큰 향나무로 담장을 두른 집으로 향한다. 빽빽하게 자란 향나무를 곱게 다듬어 일렬로 담장을 만든, 집주인의 정갈한 성품이 느껴지는 집이다. 은서는 고향 집을 찾은 탕아처럼 집안을 기웃거린다. 삐죽 열린 대문 사이로 탐스러운 꽃들이 어우러진 넓은 마당이 보인다. 마당 한쪽, 길게 늘어선 빨랫줄에는 새하얀 이불 홑청이 바람을 따라 넘실넘실 춤을 춘다. 전쟁 같은 삶이 사라진 평화로운 전경이 그녀의 마음을 빼앗는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고, 학교 가기 싫다고 떼쓰는 아이를 달래서 등교시키고, 막 세탁을 마친 빨래를 탁탁 소리 나게 펴서 빨랫줄에 널고, 따듯한 햇살 아래서 커피를 마시는 여자를 상상해 본다. 가슴 저리도록 부럽다.
언제부턴가 은서는 평범한 일상이 자아내는 따뜻한 행복이 눈물 나게 그립다. 그녀의 삶이 불행해서는 아니다. 매정하게 지나간 세월처럼 행복이 그녀 곁을 떠나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 때문이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은서는 마음을 추스른다. 낯선 집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녀의 발길이 맞은편 골목으로 이어진다. 집집이 창가에 걸어놓은 화분에 꽃들이 만개했다. 이방인을 마중하려는 마을 사람들의 배려가 따뜻하게 다가온다. 은서는 천천히 골목길을 걸으며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집들을 느릿느릿 기웃거린다.
한바탕 산책을 마친 그녀는 베제르 강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에 자리를 잡는다. 강을 따라 사이좋게 늘어선 집들이 보인다. 사각형 집에 삼각형 지붕 모양, 어린 시절 그녀가 도화지에 그리던 집과 비슷한 모양의 주택들이 성당을 중심으로 올망졸망 모여 아름다운 강가의 풍경을 만들고 있다. 빛바랜 붉은색과 검은색 지붕들의 조합이 단조로움에 포인트를 준다. 경사가 급한 삼각형 뾰족 지붕 중간에는 그림책 같은 다락방 창문이 보인다. 은서의 시선이 조금 아래로 향한다. 강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에는 아름드리나무가 길동무처럼 정겹게 서 있고, 카페와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강가의 길은 막 세수를 마친 수도승처럼 정갈하다. 강 건너 풍경에 마음을 빼앗긴 은서는 진한 에스프레소 대신 우유가 듬뿍 들어간 카페오레를 주문하며 마주 보이는 집들을 향해 미소를 보낸다. 이제 마을의 평온한 삶을 그림에 담을 시간이다. 그녀는 천천히 스케치북을 열고 연필을 잡는다.
그녀에게 그림은 머리가 아닌 가슴이 시키는 일이다.
뒤늦게 시작한 그림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나 이름을 날릴 정도는 아니었다. 아버지의 재력과 줄리앙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몇 번의 전시회도 힘들었을 거다. 그 당시, 그녀는 욕망의 그림을 그렸다. 재능과 비교해 따라주지 않는 명예 때문에 오기로 그림을 그리고, 전시회를 열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고, 그림은 이제 그녀의 가슴을 뛰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혼하면서 시작한 갤러리가 더 그녀와 궁합이 맞았다. 그려지지 않는 그림과 갈등하고 부끄러운 그것들을 웃음을 가장한 채 보여주어야 했던 시간보다, 마음에 드는 그림을 찾아 건사하는 것이 좋았다. 갤러리를 운영하며 그녀의 그림을, 그녀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어서 좋았다. 욕심을 덜어내고 진정으로 그림을 즐기는 법을 알게 된 것도 좋았다. 버리고 나니 비로소 얻었다는 깨달음처럼 그녀의 그림도 차츰차츰 안정을 찾아가는 중이다.
“그림 좋은데요?”
낮고 굵은 목소리가 불쑥 끼어든다. 몽띠냑의 아침을 묘사하던 그녀의 손이 얼음처럼 굳어진다.
“아까부터 지켜봤습니다. 아마추어 같지 않은데 혹시 성함이……”
점점 뜨거워지는 날씨에도 스카프로 멋을 낸 남자가 그녀 옆으로 다가선다. 얼굴이 작고 다리가 길어서일까, 키는 작아도 스타일이 좋다. 깊숙한 눈매와 뾰족한 콧날, 다부진 입술이 지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은서는 그림과 만나는 이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 남자가 브래드 피트였어도 그럴 것 같다. 할 수 없다. 그녀만의 방법으로 이 상황을 모면하기로 한다.
“저, 저는…… 프랑스, 말을 못, 해요.”
은서가 더듬거리는 프랑스어로 중얼거리자, 남자가 오히려 미안해한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책없이 방해했네요.”
다행히 남자는 깍듯하게 인사를 한 뒤, 자리로 돌아간다. 프랑스 땅에서 오랜 시간 외국인으로 살아온 그녀는 가끔 이렇게 언어를 외면한다. 곤란한 상황에 빠졌을 때, 때론 말을 모르는 외국인 행세를 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상점에서 물건을 살 때는 프랑스어보다 영어를 쓰기도 한다. 그러면 대우가 달라진다. 영어를 못하는 콤플렉스 때문인지, 대부분 프랑스 점원들은 자기네 나라 말을 하는 동양인은 식민지 국민처럼 하찮게 여기지만, 영어를 쓰는 동양인에게는 비굴할 정도로 친절하다. 또, 은서는 웃는 얼굴과 상반된 언어로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 바람둥이 줄리앙의 뺨을 후려치고 싶을 때마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한국말을 터트렸다.
“이 바람둥이 자식아.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니?”
줄리앙은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한국어가 종달새의 지저귐 같다며 좋아했다. 그녀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었던 그는 그녀의 웃음을 언어로 오해했다. 아직도 그는 ‘나쁜 놈’이 프랑스어로 ‘상남자’라고 착각하고 있다.
은서는 다시 스케치북으로 시선을 돌린다. 강을 따라 장승처럼 서 있는 가로등에 꽃 화분을 매달아 놓은 몽띠냑 사람들의 정성을 묘사하던 중이었다. 집중이 잘 안 된다. 마음으로 이어지던 그림의 흐름이 이미 끊어진 상태다. 가볍게 한숨을 쉬며 스케치북을 덮는데, 아이폰이 울린다. 태주다. 타이밍 한번 기막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