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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우씨 Jul 12. 2020

자수성가는 어려워 -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영화플레이리스트 #06

최근 세태에 대한 분석 중에 가장 흥미로운 것은 ‘헤어롤’에 관한 얘기였다. 버스나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서 앞머리에 헤어롤, 속칭 구루프를 말고 있는 ‘Z세대’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색깔은 보통 분홍색이어서 눈에 확 띈다.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 허나 헤어롤러들의 관심은 그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이동해서 지금 만나러 가는 ‘그 사람’ 하나일 뿐이다. 관심 없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건, 그들이 바라보는 자신이 어떤 상태이건 크게 중요치 않다.


지하철에서 화장을 하거나 고치는 사람들에 대한 화제로 넘어오면 좀 더 논쟁적이다. 이 경우는 대부분 Z세대보다 나이가 많은 직장인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훨씬 엄격한 잣대가 적용된다. 도대체 화장을 왜 바깥에서 하는 거야, 아무리 바빠도 그 시간까지 감안해서 일어나야 하지 않나, 라떼는 말이야 등등. 


공격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애초에 상대방이 왜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지부터를 이해하지 못한다. 당신 보라고 하는 화장이 아닌데. 그냥 좀 신경 끄고 보시던 유튜브 계속 보시면 안 되는 건가? 대도시의 장점이라는 게 결국 익명성 무심함 시크함 뭐 그런 거에 있는 거 아닌가 말이다.



서슬 퍼런 가부장제가 지배하던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점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이런저런 명언을 남긴 퇴계 이황 선생의 말 중에 신독(愼獨)이라는 개념이 있다. 요약하자면 홀로 있을 때에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라는 얘기인데, 지금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얘기가 돼버렸다. 


헤어롤을 붙였을 때와 뗐을 때, 화장을 했을 때와 안 했을 때 우리는 각각 다른 사람이 된다. 면접장 안에서의 나와 밖에서의 나도 다른 사람이다. 일종의 역할극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 메커니즘을 위선이라는 두 글자로 매도해선 곤란하다. 그보다는 각자 스스로가 원하는 인생으로 가는 여정에 가깝다. 사람은 하나여도 우리는 제각각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니까 상황에 맞는 페르소나도 다양해질 수밖에 없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THE FAVOURITE)’는 세상이 자신에게 부여한 역할을 거부하고 여왕 앤의 곁으로 가서 ‘자아실현’을 하려고 시도했던 여성들을 카메라의 중심에 놓는다.


영화의 초반에는 엠마 스톤이 연기한 에비게일이 사회의 밑바닥에서 어떤 수모를 당하는지 몇몇 에피소드가 나온다. 왕정(王政)은 한 나라를 왕의 소유물로 보는 체제다. 거기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앤 여왕 치세는 18세기 초다.



이 시대는 “신은 죽었다”고 말한 니체는 물론 “개인이 곧 군주”라고 말한 존 스튜어트 밀조차도 등장하기 이전이다. 세상은 왕을 중심으로 돌아갔고, 평민과 종들은 그저 왕의 배경이자 소유물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주장할 수 없다. 심지어 에비게일은 여성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고개를 숙이고 현실에 순응하지만 에비게일은 달랐다. 그녀는 ‘자수성가형’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녀를 일개 악녀로 치부하기 이전에 우리는 시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상승욕구를 추구한 그녀의 이 의지에 주목해야 한다. 문명의 진보라는 게 결국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자수성가를 해내기 위해 사라(레이첼 와이즈)에게 했던 행동에는 물론 선을 넘는 것들이 많았다. 사실 이 부분이 바로 자수성가의 어두운 면이다. 자수성가에는 분명 인간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훌륭한 측면이 있지만, 몇 가지 전제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영혼을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그 전제란 자수성가를 원하는 인간에게 얼마나 다양한 선택지가 있느냐다. 권력의 경우 필연적으로 공급이 제한된다. 모두에게 개방되는 순간 더 이상 권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우스 오브 카드’ 같은 드라마를 보면 현대사회에서도 제한된 권력을 원하는 인간이 얼마나 성실하게 움직여야 하는지가 잘 나온다.



시대를 막론하고 권력을 원하는 인간은 자신의 욕망이 거처를 찾지 못하고 튕겨 나오는 실패의 경험을 여러 번 하게 된다. 그리고 이 경험이 축적되면 영혼이 병들기 시작한다. ‘성공의 어머니’라는 루머와는 달리 실패는 크고 작은 생채기를 남길 뿐이다. 성공의 어머니는 ‘작은 성공’이지 실패가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원하던 것을 이뤄내고도 여전히 고단한 엠마 스톤의 모습을 비춘다. 그 장면은 우리의 마음에 하나의 질문으로 스며든다. 각고의 노력 끝에 원하던 것을 얻었으니 이제 그녀가 행복해 보이는가? 


서서히 사라져가는 에비게일의 모습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생의 어려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왜 우리가 ‘소확행’에 몰두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왕정 시대만큼은 아니지만 과거에 비해 딱딱하게 굳어버린 세계를 살아가는 와중에 우리는 알게 돼버린 것이다. 온 세상을 위해 헤어롤을 말 수는 없다는 것을. 


인류를 위한 도전, 역사에 기록되는 인생에도 의미는 있겠지만 너무도 힘든 길이라면, 지금 만나러 가는 단 1명의 사람을 위해서만 스스로를 단장하는 그 삶에도 우주의 넓이만큼 커다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안다. 오늘 아침 지하철에서 헤어롤을 만 사람을 마주쳤는가? 눈앞의 행복에 집중하는 그를 존중해주자. 그는 거리의 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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