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우씨 Jul 15. 2020

하트시그널3 - 로미오의 첫사랑

감정을 동력으로 돌아가는 '연애발전소'

‘하트시그널3’의 결말 내용이 포함된 글입니다.


한번쯤 가져봄직한 의문:

'로미오와 줄리엣'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 왜 안 들어갈까?


학자나 평론가들의 설명은 대략 이렇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집안 간의 원한에 휘말린 것일 뿐 개개인의 잘못으로 인해 파국을 맞은 게 아니므로 비극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한 해석이다.


내 의문을 명쾌하게 해소시켜 준 사람은 시오노 나나미였다. 그녀는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한 조각의 절망도 없는 달콤하고 격렬한 젊은이의 사랑 이야기다."


Romeo + Juliet (1996)


바즈 루어만 감독의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1996)을 보면 이러한 설명이 시각적으로 확인된다. 이 작품은 비극의 반대편에 위치한다. 차라리 한 편의 뮤직비디오다. 순수한 사랑의 감정만이 열병처럼 끓어오른다. 죽음조차 이들의 반짝임을 없애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불꽃같은 청춘을 더욱 부각시킨다.


하트시그널 얘길 하면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끌어들인 이유는, 하트시그널이야말로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이기 때문이다. 달콤한 연애의 감정만이 아름다운 음악, 그리고 '뽀샤시'한 화면과 함께 펼쳐진다. 다른 건 아무 것도 필요 없다.




서울 소재의 어느 저택에 8명의 청춘남녀가 입주한다. 이들은 한 달 간 함께 살게 되는데, 이 생활엔 규칙이 하나 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이들은 매일 밤 그날 하루 자신의 마음에 들어온 사람에게 문자를 보내야 한다.


소위 말하는 '썸'이 이들에게는 무제한으로 허용된다. 감정이 가는대로 행동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오로지 8명만이 존재하는 세계. 이들은 서로의 라이벌이지만 동시에 친구가 되어주고, 그 중 누군가는 연인이 된다.



하트시그널은 설렘이라는 감정만을 동력으로 하는 연애발전소다. 이들은 주말을 이용해 공식 데이트를 하는데, 우리가 맛집이라 부르는 '핫 플레이스'에 주로 들른다. 그런데 이들이 데이트를 할 때 절대 나오지 않는 장면이 있다. 그곳에 들어가게 위해 으레 거쳐야 하는 '웨이팅' 장면이다.


이들은 대중교통 또한 이용하지 않으며, 가까운 거리여도 자동차를 통해서 움직인다. 그래서 차 안에서 내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서울시에서 차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주차난 역시 이들에겐 '해당사항 없음'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들은 오로지 감정에만 집중한다. 결코 현실적이지 않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감정이란 것의 실체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박지현


2020년 방영된 시즌3는 박지현이라는 여성 출연자에 의해 많은 화제를 낳았다. 미스코리아 출신이긴 하지만 연예인은 아닌 그녀는 지난 8주간 '비(非)드라마 화제성' 부문 1위를 독식했다. SNS는 유재석보다, 이효리보다, 임영웅보다 박지현에 대해 더 많은 얘기를 쏟아냈다.


박지현만이 가진 매력은 뭐였을까? 그녀의 성격에 대해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하나 있다. 그녀는 하트시그널 역사상 최초로 모든 남성 출연자들에게 문자를 받아본 동시에 모든 남성 출연자들에게 1번 이상 문자를 보낸 인물이다.


반드시 이성로서의 매력을 느낀 게 아니더라도, 그날 하루 많은 시간을 보냈으면 그 사람에게 문자를 보내는 식이다. 이러한 행동은 그녀의 배려심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녀가 상대방의 기분을 매우 신경 쓰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박지현은 자신과 놀랍도록 닮은꼴인 한 남자에게 마음이 흔들린다.


천인우


갓 서른이 된 천인우는 그 나이대 남자가 쌓을 수 있는 최고의 스펙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별명이기도 한 북극곰 같은 매력으로 시그널하우스 입주 첫날부터 박지현에게 돌진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너무 저돌적이어서 거부감이 들 정도였지만 점점 그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큰 덩치 안에 숨어 있는, 거부당하는 것이 너무 두려운 한 소년의 모습이.


박지현과 천인우는 첫날부터 서로 호감을 느끼지만 그 호감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이것을 운명의 장난이라 부를 수도, 제작진의 작전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둘은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공식데이트를 하지 못하며, 이 과정에서 천인우는 한 달 만에 7kg이 빠질 정도로 심한 마음고생을 한다. 1일 1식보다 더 무서운 '마음고생 다이어트'다.



천인우가 놓친 기회는 김강열이 전부 가져갔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천인우가 한 번도 하지 못한 공식데이트 기회를 김강열은 몇 번이나 잡는다. 그는 때로는 영리하게 움직였고, 때로는 모든 것을 그저 운에 맡겼는데도 박지현과 데이트를 할 수 있었다. 모든 별들이 김강열을 향해 정렬하는 것 같았다.


김강열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마음껏 누리면서 박지현의 마음에 스며 있는 천인우의 흔적에 자신의 색깔을 덧칠해 나간다. 언뜻 그는 단순히 운이 좋아서 박지현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의 성취는 결코 공짜가 아니었다.


김강열은 프로그램 시작부터 끝까지 오로지 단 1명 박지현에게만 문자를 보내는 뚝심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건 그러면서도 박지현에게 결코 부담을 주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자신의 마음은 확실하게 드러내지만 상대방에게 보답을 바라지는 않았다. 말은 쉬워도 실제로는 어려운 이 자세로 김강열은 끝내 박지현의 마음을 얻어낸다.



하트시그널3의 부제는 '다시, 첫사랑'이었다. 나는 이 제목이 결코 아무 의미 없이 붙은 게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결말에 대한 암시를 품고 있다고 봤다.


프로그램 전체가 박지현의 러브라인을 중심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나는 박지현이 김강열에게 흔들렸을지언정 결국 '첫사랑'인 천인우에게 다시 돌아갈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반전은 '다시, 첫사랑'이라는 부제가 박지현이 아닌 천인우의 서사였다는 점이다. 천인우는 또 다른 여성 출연자 이가흔의 적극적인 구애에 한때 마음이 흔들렸고 또 한편으로는 많은 위로를 받기도 했다. 항간에는 천인우-이가흔이 실제 커플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두 사람의 결합 가능성이 더 높게 점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천인우가 마지막에 고른 것은 박지현이었다. 숱하게 많은 엇갈림과 거절을 통해 이미 그녀의 마음은 김강열에게 가 있는 게 확실해 보였지만, 천인우는 마지막 사랑의 화살표를 박지현에게 날렸다. 거절당하는 게 너무나 두렵기만 했던 한 소년이, 거절일 것을 알면서도 화살을 쏘는 로맨티스트로 거듭난 것이다.


HYUNSE 라인드로잉 ( 인스타 hyunse_21 )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다. 줄리엣은 로미오의 '첫사랑'이 아니라는 점이다. 로미오의 첫사랑은 로잘린이라는 인물이다. 로미오는 사실 이 로잘린을 보기 위해 파티장에 갔다가 줄리엣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내가 사랑했었던가? 시각이여 부인하라

진정한 아름다움 이 밤에야 봤으니까”


-윌리엄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中


하트시그널3의 로미오가 천인우라면, 줄리엣은 두 번째 사랑인 이가흔일 것이다. 그녀 역시 엄청난 매력을 보여주며 천인우와 이뤄진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천인우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돌아보는 과정을 거쳐 '첫사랑' 박지현에게 돌아간다. '다시, 첫사랑'이라는 부제는 천인우의 실패와 함께 비로소 완전해졌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죽었어도 그들의 이야기는 비극이 아닌 것처럼 천인우의 외로운 화살표 역시 결코 슬퍼 보이지 않았다. 이뤄지지 않는다 해도 이것은 비극이 아니다. 이뤄지지 않음으로 인해 그들이 한층 더 성장했음을 믿을 때, 이 이야기는 '실패해서 더 아름다운' 미담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제가 진행하는 네이버 오디오클립 방송에서도 ‘하트시그널3’를 다뤄봤습니다.


많이 들어주세요. :)

작가의 이전글 너를 만난 오늘, 남아 있는 날들 - 윤희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