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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우씨 Jul 09. 2020

너를 만난 오늘, 남아 있는 날들 - 윤희에게

영화플레이리스트 #05

김금희의 단편소설 ‘누구 친구의 류’에는 이별을 하면서 묘한 말을 쪽지에 적어 전달하는 남자가 나온다.


“너를 잃는 오늘이 앞으로 내게 남아 있는 날들 중 그나마 가장 행복한 날일 거야.”


곱씹을수록 묘한 이 문장을 전해들은 여자는 20년 가까이 이 말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그랬다는 증거가 있다. 어느 대리운전 기사에게 거의 비슷한 표현을 그녀가 쓰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아저씨가 앞으로 오십 년을 산다면 오늘이 가장 불행한 날일 거예요. 더 나빠지지는 않을 거예요. 믿으세요.”


현재를 최고점, 혹은 최저점으로 선언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비감이나 축복을 반대로 유도하는 이 표현법을 쓸 때마다 그녀는 한 번씩 류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녀는 그와의 추억으로 긴 시간을 지내왔는지도 모른다.


일러스트: 백삼(103layers)


유행가 가사에서 ‘추억’에 대한 언급, 예를 들어 추억만은 아름다워야 한다거나(김건모) 추억이 사랑을 닮았다거나(박효신) 하는 표현들이 나오면 대부분은 과장일 거라고 생각했던 게 바로 얼마 전까지의 일이다. 서로 다른 빛깔의 연애가 이어지던 20대에는 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새 사람 찾아야지 추억은 뭘 추억이야.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는 없다지만 그렇다고 추억으로 어떻게 살아? 노래 한 곡 뽑아내려고 오버들 하시는구만. 그런데 말입니다, 그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파란만장한 연애사건의 뒤안길에 남는 것은 딱 두 가지 – 한 사람의 이름과 두 사람의 추억이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연애란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어떻게 기억하느냐의 문제로 좁혀질 수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하나의 문장으로 기억될 수도 있고 찰나의 표정으로 추억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를 만날 때 그 사람의 귀함을 알아야 하고, 있을 때 잘해야 하는 것이다. 언젠가 그는 사라지겠지만 한 번씩 떠오르는 그의 이름과 마주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므로.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 정현종 ‘방문객’ 


1986년생 임대형 감독이 만든 영화 ‘윤희에게’는 바로 이 ‘이름과 추억’에 대한 이야기다. 아버지를 잃은 쥰은 마음에 담아두었던 이름 윤희를 나지막이 호명한다. 눈은 소리를 더 잘 전달시켜 주는 매질이라 했던가. 무거운 눈이 펑펑 내린 일본의 어느 마을에서 부른 윤희의 이름은 쥰의 할머니 마사코를 거쳐 바다를 건너고, 윤희의 딸 새봄을 경유해 결국엔 윤희 본인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이번에는 쥰과의 추억을 짊어진 윤희가 바다를 건널 차례다.


영화는 하나의 이름이 또 다른 이름에게 가 닿는 이 과정을 새하얀 오타루의 풍경, 그리고 김해원/임주연의 음악과 함께 차분히 보여준다. 엄마가 된 윤희를 일본으로 데려온 딸 새봄이 자기 남자친구와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가는 장면도 볼거리다. 


두 세대의 대비는 상당히 흥미롭다. 새봄과 남친 경수는 대개의 어린 연인들이 그렇듯 ‘친구’의 역할까지 2인분을 한다. 진로에 대한 고민이나 그날그날의 기분을 털어놓을 수 있는, 이른바 소울메이트다.


일러스트: 백삼(103layers)


우리가 애인에게 ‘영혼의 동반자’ 역할을 기대하기 시작한 건 알고 보면 아주 최근의 일이다. 미국의 경우 히피로 대표되는 성 해방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1960년대 이전에는 부모 소개로 동네에서 ‘적당한 사람을 찾아’ 결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결혼이 어른의 마지막 관문이 된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결혼이 ‘시작점’이었다. 너무 깊은 고민을 할 여유가 없었고, 지금 기준으로는 지나치게 적은 숫자의 사람만 만나보고 결혼을 결심했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기성세대가 “결혼은 뭘 모를 때 해야 한다”고 조언하는 이유다.) 


지금은 어떤가? 관념의 변화에 덧붙여 스마트폰까지 거머쥔 우리는 이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도 미래를 꿈꿀 수 있다. 틴더 어플 하나면 하룻밤에도 수십 명의 사람과 상상연애가 가능하다. 


결혼을 꼭 해야 한다는 통념이 깨졌기 때문에 연애상대에 대한 기대치는 오히려 치솟는다. 심리 치료사 에스더 페렐은 “우리는 단 한 사람에게 가서, 온 마을이 다 동원돼야 줄 수 있는 것을 달라고 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이것이 우리 눈앞에 있는 새 봄(new spring)인 것이다.


일러스트: 백삼(103layers)


새봄 엄마가 어렸던 시대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았다는 걸 이 영화는 짚는다. 윤희의 오빠는 예전에 윤희에게 결혼을 종용했을 뿐더러 지금까지도 그녀의 삶에 이런저런 간섭을 하려고 든다. 지금도 그런데 윤희와 쥰이 처음 만났을 무렵엔 온 마을이 다 동원돼 그들을 반대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관계를 온전히 지킬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했을 것이다. 


윤희와 쥰은 서로 사랑했지만 구체적인 추억을 만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 긴 시간 공백을 채운 것은 변형된 형태의 추억 - 꿈이다. “나도 네 꿈을 꿔.” 마침내 만나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는 카메라는 두 사람의 앞길을 비추고 있기도 하다. 다음 계절은 무엇일까. 달빛 겨울이 가면 새 봄이 올까.


눈길 위에 남는 발자국처럼 두 사람의 추억은 이제 새롭게 업데이트된다. 달은 아직 떠 있고, 둘에게 시간이 조금 생겼다. 누가 알까? 너를 만난 오늘이 앞으로 남아있는 날들 중에서 가장 불행한 날일지도.


* 이 글에 삽입된 모든 그림은 일러스트레이터 백삼 작가의 작품입니다. (@103lay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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