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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우씨 Jul 07. 2020

붓은 답을 알고 있다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영화플레이리스트 #04


이 글에는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컨택트'의 구체적인 내용이 서술돼 있습니다.


먼저 언급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 테드 창의 단편 ‘네 인생의 이야기(Story of Your Life)’다. 이 작품은 드니 빌뇌브의 영화 ‘컨택트(원제 Arrival)’의 원작이기도 하다. 


언어학자인 루이즈 뱅크스는 지구에 도착한 외계 생명체 ‘헵타포드’의 언어를 해석해 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헵타포드는 다리가 7개고 완벽한 대칭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전 방위에 눈이 달려 있어 모든 각도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이는 헵타포드가 360° 모든 방향을 전방(前方)으로 인식한다는 의미다.


인간의 눈은 우리가 ‘앞’이라고 부르는 한 방향을 향한다. 그래서일까? 우리의 언어 역시 뒤에서 앞으로 진행된다. 당신이 읽고 있는 이 문장은 좌에서 우로 진행되고 있다. 일본인들은 위에서 아래로 뻗어가는 문장을 읽는다. 우리는 그렇게 순차적으로 의미를 파악하며, 의미의 파악이란 으레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헵타포드는 이 고정관념을 뒤흔든다. 루이즈는 헵타포드들이 인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언어(글자)를 구사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헵타포드들이 허공에 흩뿌리는 글씨는 둥근 그림, 하나의 문양(文樣)처럼 생겼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는데 헵타포드들은 망설임 없이 허공에 이 문양을 뿌린다. 


오래지 않아 루이즈는 깨닫는다. 헵타포드들은 허공에 글자를 쏘는 순간, 그러니까 첫 획을 긋는 순간부터 자신이 어떤 말을 할지를 완벽하게 알고 있다. 우리는 흔히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고 말하지만 헵타포드의 글자에는 그런 게 없다. 그들은 고정된 의미의 묶음을 덩어리로 만들어서 단번에 흩뿌린다.


영화 '컨택트[Arrival]'


언어의 차이는 삶을 바라보는 관점에도 영향을 준다. 헵타포드와 인간은 둘 다 우주라는 공간을 공유하지만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과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판이하다. 인간의 삶은 좌우로 흔들리면서, 뒤에서 앞으로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이다(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느낀다).


헵타포드의 경우는 다르다. 그들의 삶이란 목적지가 정해진 여행이며, 그 목적지까지 가는 여정을 행위로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래서일까? 헵타포드에겐 감정의 동요는 물론 호기심도 전혀 없는 것 같다. 삶이란 그저 아무런 흔들림도 없이, 고정된 의미를 실현하는 절차일 뿐이다.


이후부터는 영화와 소설의 진행이 달라진다. 영화감독 드니 빌뇌브는 헵타포드의 언어가 루이즈에게 마치 미래를 예지하는 슈퍼파워를 부여한 것처럼 해석한 느낌을 준다. 영화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면 ‘왠지 모르게’ 미래를 알게 된 루이즈는 인류가 촉발하려는 재앙을 막아낸다.


루이즈가 인류의 미래를 바꾸는 듯한 이 전개에 나는 작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 헵타포드는 언어를 매개로 초능력을 부여하는 예지자나 사도가 아니라 그냥 헵타포드일 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드니 빌뇌브 역시 자신이 원작을 좀 다르게 해석했다는 걸 의식한 듯 헵타포드에게 소설과 다른 이름을 붙였다).


테드 창은 또 다른 단편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에서 우리가 설령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고 해도, 그러니까 미래를 알게 된다고 해도 과거와 미래는 결코 바뀌지 않으며 단지 우리는 그것에 대해 더 잘 알게 될 뿐이라고 말했다. 


“인생이 만약 신이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우리는 등장인물인 동시에 관객이고, 그것을 살아가면서 거기에 대한 교훈을 얻는 것이다.”




이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헵타포드 이야기를 먼저 꺼낸 이유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주인공 마리안느가 처음으로 엘로이즈를 그리기 시작할 때, 그 첫 획을 떼는 순간부터 이후의 전개를 알고 있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헵타포드의 글자가 그런 것처럼.


붓 끝으로 엘로이즈의 윤곽선을 가늠할 때부터 마리안느는 ‘왠지 모르게’ 알았던 게 아닐까.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질 것을, 하지만 그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할 것을, 그럼에도(혹은 그렇기 때문에)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을 말이다.


한 가지 전제로 할 점은 이 영화의 배경이 1770년대라는 사실이다. 헵타포드와 인간만큼은 아니더라도 현대인과 18세기의 인간은 세계관 자체가 달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영국 고전학자 메리 비어드는 ‘고대 로마의 웃음’에서 현대인의 웃는 표정이 로마인들에게는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로서의 문화’를 쓴 역사학자 워렌 서스먼은 ‘성격’이라는 영어단어 자체가 18세기 이전엔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지금의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세계에선 전혀 당연한 게 아니었다. 



남성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이 영화에서 인물들이 언뜻 무기력해 보이는 것도 이러한 시대상으로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하녀 소피가 임신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강간을 당한 거라면 정의를 구현할 여지는 없는지, 그 아이를 낳아 기를 방법은 있는지에 대해 영화 속 여성들은 고민하지 않는다. 


아이와 소피가 함께 행복할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 이 영화 안에서는 상식으로 받아들여진다. 상식을 받아들이되 적극적으로 행동(임신중절)하는 정도만이 이들에게 허락된 주체성의 전부다(그리고 이들은 중절의 기록을 그림으로 남긴다). 셋은 함께 카드를 치지만 그것도 집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들은 셋이 동등하다는 걸 아는 동시에 그 생각을 이해해줄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와의 ‘끝’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은 그녀가 엘로이즈와 같은 집에 있는데도 두 번 정도 엘로이즈의 환상(유령)을 볼 때다. 그 순간 엘로이즈는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비현실적인 존재가 된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만나고 있지만 헤어져 있는. 


엘로이즈의 유령은 두 사람 앞에 철로처럼 고정돼 있는 이별을 조금 일찍 소환한다. 실제로 영화 후반부에는 엘로이즈가 유령과 똑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사랑의 행복이 넘실대야 마땅할 시점에 마리안느의 눈앞에는 ‘헤어짐의 예고편’이 상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도피를 계획하거나 둘만의 결혼식을 올려보려고 시도하지도 않는다. 나중에 학생들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그림을 발견했을 때에도 마리안느는 그 그림을 내놓지 말라고 한다. 뭐는 되고 뭐는 안 되는지 이들은 슬플 정도로 디테일하게 알고 있다. 이 디테일은 운명의 거미줄처럼 그들을 옭아맨다.


거미줄에 얽혀 있는 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다. 그래도 거미줄을 끊을 순 없을지언정 흔들 순 있다. 이 영화에서 인용된 오르페우스 신화를 보자. 여성인 에우리디케가 남성인 오르페우스에게 ‘뒤돌아보라’는 요청을 했다는 건 하나의 ‘해석’이다. 독창적이긴 해도 이미 일어난 일을 조금 다르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내놓은 새로운 해석을 정신승리로 폄하한다면 그건 현대인의 횡포가 될 수 있다. 때로는 해석이 전부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삶은 그 빛깔을 달리한다. 이 영화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미리 정해진 세상이라면 때로는 해석 그 자체가 저항일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들은 무기력한 것이 아니다. 정해진 길 위에 놓여있을지언정 자신들에게 부여된 운명의 외피에 색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내적으로 맹렬하게 요동치고 있다. 그 진동이 임계점을 돌파할 때 치맛자락은 타오르기 시작한다.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에게 뒤돌아보라는 요청을 했다는 발상의 전환은 더없이 소중하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그릴 때 엘로이즈도 마리안느를 본다는 발상의 전환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제 엘로이즈는 피사체인 동시에 관찰자다. 기억되는 동시에 기억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사랑의 화살표는 연결된다. 


이들은 미래를 알고도 그것을 바꾸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것에 대해 더 잘 알게 됐다. 두 사람의 인생이 만약 신이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두 여자는 등장인물인 동시에 관객이고 그것을 살아가면서 거기에 대한 의미를 얻을 것이다.


엘로이즈가 시집가고 난 뒤 그녀를 그린 초상화에는 28페이지가 표시돼 있다. 둘만의 암호 같은 이 숫자를 보고 마리안느는 미소 짓는다. 또 마리안느는 언젠가 자신이 연주해줬던 ‘사계’를 음악회에서 들으며 눈물 흘리는 엘로이즈를 본다. 손조차 흔들지 않는다. 그저 바라볼 뿐이다. 하지만 충분하다. 사랑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산소를 맹렬하게 집어삼키며 이미 완성된 하나의 의미를 향해 타오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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