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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우씨 Jul 07. 2020

라이터를 켜라 - 버닝

영화플레이리스트 #03

버닝(2018)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에 대해 ‘하나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쓰는 소설가’라고 표현한 사람은 평론가 이동진이었다. 동의할 만한 분석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누구나 마음속에 하나씩 품고 있는 깊고 메마른 우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루키는 수십 년째 반복 중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 반복은 무의미한 재생이 아니다. 그의 반복에는 나름의 리듬과 흐름이 있다. ‘노르웨이의 숲’ 때만 하더라도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세계와 불화하던 인물들은 ‘해변의 카프카’에 이르러선 서서히 방향을 잡아가며 제법 울림(베이스)이 있는 방황을 하기 시작했다. 


‘1Q84’에선 서로를 찾아 헤매던 주인공들이 만남이라는 결실을 맺으며 함께 화음을 냈고,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벅차보이던 인물들은 최근작 ‘기사단장 죽이기’에 이르러선 자기 삶의 일부를 타인에게 내어줄 수 있는 사람들로 성장해 있다. 


하루키가 비슷하지만 멈춤 없는 이야기를 지속하는 이야기꾼이라면, 이창동은 영화판에서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감독이다. 그 역시 같은 이야기를 비슷한 톤으로 꾸준히 이어간다는 느낌을 준다. 이 느낌은 이창동 영화 특유의 리얼한 화면을 통해서 구현된다. 


우리는 현실을 피해 극장으로 달려가지만 거기에서 관객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우리를 조여 오는 태양빛이다. 심보선 시인이 노래한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 빛은 우리의 일상 속에 자객처럼 숨겨진 생채기와 흉터들을 고스란히 조명하는 것 같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창동 역시 반복의 와중에 뭔가를 진행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초기작인 ‘초록물고기’나 ‘박하사탕’ 정도까지만 해도 인물들은 세상을 향해 욕을 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이창동의 카메라는 처절한 그들의 입술을 그저 리얼하게 포착했다.


‘오아시스’ 발표 직후 이창동은 문화관광부 장관을 맡게 되는데, 흥미롭게도 공직에서 돌아온 이후부터는 영화도 조금 달라졌다. 특유의 색감을 유지하면서도 ‘밀양’에서의 신애(전도연), ‘시’에서의 미자(윤정희)는 세상을 향해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신애는 끝끝내 신에게 저항하고, 미자는 말 그대로 시를 써내려가는 식이다. 


‘버닝’은 이창동이 ‘시’ 이후 무려 8년 만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은 벽돌 한 장이다.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각색한 이 작품에는 이른바 ‘하루키스러움’과 ‘이창동스러움’이 모두 담겨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창동만의 스타일과 말하고자 하는 바가 좀 더 도드라진다.



3명의 주요 인물 – 종수, 해미, 벤의 캐릭터는 전형적이거나 우화적이다. 별개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아 하루키스럽다. 하지만 그 셋이 활동하는 무대는 이창동의 화면 속이다. 마치 하루키의 소설 속에 살고 있는 인물들을 캐스팅해 이창동의 화면 안에서 연기하게 한 것 같다. 이창동은 하루키가 창조한 인물들을 지극히 한국적인 배경 속에 던져놓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는 관찰자가 된다. 


원작과 달리 종수와 벤 사이에는 예닐곱 살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 사실상 같은 세대라고 볼 수 있지만 살아가는 모습은 판이하다. 하루하루 싸우듯 살고 있는 종수와 달리 벤은 스스로 일군 것 하나 없이 구름 위의 신선처럼 놀듯이 살아간다.


정유라에게 분노했던 대다수의 청춘들처럼 종수는 벤을 보며 번뇌의 감정을 느낀다. 영화 내내 멍한 표정으로 입을 헤 벌리고 있는 종수, 자위를 할 때조차 텅 빈 표정인 그의 눈동자에 총기가 도는 것은 오로지 벤에 대한 증오를 불태울 때뿐이다. 


종수의 증오에는 이해할 만한 지점이 있다.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벤을 따라잡기는커녕 현실에서 도망치기조차 녹록치 않다는 걸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한때 우리 모두의 목표이자 미덕이었던 자수성가(自手成家)는 이제 너무 비현실적인 일이 돼버렸다. 아니 비현실적인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자수성가가 아름답지 않은 일이 돼버렸다는 게 진짜 문제다. 


바득바득 노력해 부와 명예를 얻은들 정작 행복을 느껴야 할 마음속이 만신창이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운동을 열심히 하면 오래 살지만 연장된 수명은 운동한 그 시간 만큼일 뿐이라는 농담처럼, 각고의 노력을 거쳐 자수성가를 한들 전혀 행복해보이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다. 자수성가는 이제 ‘가성비’가 너무 떨어져 성가신 일이 돼버리고 말았다.



이창동은 이런 시대에 태어난 젊음들에게 그렇다면 차라리 분노에 주목하라고, 그 감정을 소중히 여기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는 점잖은 표정으로 메마른 헛간에 라이터를 던지는 방화범이다. 영화 후반부에서 종수는 스스로 내린 판단으로 제 나름의 정의를 실현해 나가는데, 이는 주인공이 일체의 노력을 중단하는 하루키의 원작과 이창동의 영화가 극명하게 달라지는 분기점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심한 표정으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하루키 월드에서 인물들을 빌려온 이창동은, 소설에선 없었던 격렬한 표정을 그 인물들에게 그려 넣는다. 지금이 뭔가를 창조하고 성취할 수 없는 시대라면 부수기라도 하라고, 적어도 그 파괴에 혼을 담아 보라고 그는 말하는 것 같다.


대안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감행하는 창조적 파괴는 어디까지 용인될 수 있을까? 뭔가를 만드는 이야기만큼이나 태워버리는 이야기에도 그 나름의 울림(베이스)이 있는 걸까? 적어도 이창동은 자기가 만물을 다 안다는 듯 현인 행세를 하거나 젊은 세대들에게 밑도 끝도 없는 위로를 늘어놓지 않는다. 위에서부터 내려다보는 강압적인 시선을 배제한 채로 이 작품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뭔가를 불태우며 오랫동안 연기를 뿜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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