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플레이리스트 #02
[단독] 도쿄 스미다강 실종 5세 여아, 좀도둑 가족이 숨겼다
“지난겨울 도쿄 스미다강 주변의 자택에서 홀연히 실종된 여아 유리(5) 양이 약 반년 만에 한 좀도둑 가족에게서 발견돼 파문이 일고 있다. 발견 당시 유리양은 비교적 건강한 모습이었지만, 전문가들은 그녀가 심적으로 상당히 큰 충격을 받은 상태일 것으로 추정 중이다.
경찰의 조사에 따르면 유리 양은 자택 주변에서 납치된 이후 ‘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초등학생 나이대의 소년 쇼타와 함께 반년동안 도둑질을 배웠다. 시바타 노부요라 불리는 윤락가 출신의 30대 여성은 오사무라 불리는 40대 남성과 함께 몇 년 전 비슷한 수법으로 쇼타를 납치, 좀도둑으로 기르고 있었기에 충격을 더하고 있다. 또한 이들 둘은 노부요의 전 남편 A씨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의 줄거리 일부를 신문기사 논조로, 그러니까 외부인의 시선으로 정리해 본 것이다. 조금만 더 분발하면 이 기자는 특종상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파면 팔수록 이 가족의 실체에는 경악스런 데가 많기 때문이다. 퇴폐업소에서 일하고 있는 10대 소녀 아키, 하츠에 할머니의 미심쩍은 수입원 같은 것들.
이윽고 ‘그것이 알고 싶다’가 취재를 시작하면 이 사건은 실시간 검색어에도 회자될 것이다. 수많은 기사가 쏟아지겠지만 댓글 어디를 살펴봐도 이들 가족을 진심으로 옹호하는 의견은 없을 확률이 높다. 외부인의 시선으로 보면 복잡할 게 별로 없는 사악한 사건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은 복잡하다. 그렇게 쉽게 이들 가족을 매도할 수 없다. 왜일까? 우리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시선으로 이들의 이야기를 먼저 접했기 때문이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감독의 은근한 눈길이 이들 가족 간의 미묘한 정(情)과 유대감을 포착하는 장면을 이미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 후반부에 몰아치는 외부인들의 공격에는 관객들도 같이 상처를 받는다.
2018년 칸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이 영화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결정판으로 불린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하나의 주제를 여러 장편에서 끊임없이 변주하는 느낌을 주듯,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역시 가족이라는 테마를 지속적으로 다뤄왔다.
이번 영화 ‘어느 가족’은 그가 이전에 만든 가족 영화들에게서 엿보이던 디테일과 주제의식이 한곳에 모여 폭발하고 있다. 피가 섞이지 않은 식구와 어디까지 유대할 수 있느냐의 문제(‘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가까이서 살다 보면 필연적으로 목도하게 되는 인간의 부족함(‘바닷마을 다이어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을 끝까지 긍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의 아이들(‘아무도 모른다’).
마트에 진열된 물건은 “누구의 것도 아니”라면서 죄의식 없이 훔치는 이들 가족은 기이하게도 집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크로켓은 제값을 주고 먹는다. 여기에는 무슨 복잡한 철학이 있는 게 아니다. 그저 크로켓 주인은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오사무가 다리를 다쳤을 때, 이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가상의 존재가 주는 산업재해 보험금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받아낼 마음을 먹는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점의 뚜껑만 덮는 식으로 회피하는 어른들의 사고방식은 소년 쇼타에게도 이어진다. 쇼타는 할머니가 천국에 있다는 린의 말에 “그럼 이제 잊도록 해”라고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복잡한 문제에 대해선 어차피 생각할 겨를도 없다.
골치 아픈 문제는 대충 얼버무리고 그대로 둬서 결국 문제를 악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이들 인생의 테마다. 하물며 이 영화에는 간단한 요리를 제외하면 집안일을 하는 장면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아무 것도 안 해도 가만히 두면 먼지가 쌓이는 것처럼 삶 주변의 상황들은 착실히 악화되지만, 그런 것들을 외면할 때에만 이들은 성실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극단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우리 중 누가 그래본 적이 없겠는가?
이 가족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유대감, 일본어로 키즈나[絆]라 불리는 감정을 처리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보이건 보이지 않건 유대감은 싹텄다. 그래서 노부요는 린을 지키기 위해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고, 모든 리스크를 끌어안고 수라장으로 저벅저벅 걸어간다.
여기에도 무슨 복잡한 철학이 있는 것은 아닐 터다. 그저 그동안 서로가 지켜봐온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서로 간에 축적된 시선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감정을 잉태시킨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시선으로 이들을 봐온 우리가 쉽사리 비난의 대열에 동참할 수 없듯, 이들 역시 남들이 뭐라고 말하든 서로를 철저하게 버릴 수는 없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모순에 찬 것이며 성실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위선이 숨겨져 있고 고결한 정신 속에도 얼마나 많은 비열함이 숨어 있는지, 또 사악한 마음속에는 얼마나 많은 선량함이 깃들어 있는지, 그 무렵의 나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달과 6펜스’, 서머셋 몸)
누구의 마음에도 빛과 어둠은 있다. 고결함이 있고 추악함이 있다.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모순이 있다. 그런 주제에 우리는 스스로의 잘못에는 너그럽고 타인에게는 단호하다. 그 정도 인격의 우리가 때때로 타인을 감싸 안을 수 있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지켜봐온 시간의 무게 덕분이다. 때로는 시간만이 구원이다.
허물이 있는 사람밖에 등장하지 않는 이 영화 ‘어느 가족’은 가족의 본질이 결코 도덕성에 있지 않음을 상기시키며 서로서로 ‘봐줄 것을’ 권유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무렵이면 우리는 이제 안다. 보는 것은 중요하다. 시선에는 힘이 있다.
▲함께 보면 좋은 작품
-서머셋 몸 ‘달과 6펜스’
-최은영 단편 ‘손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다른 영화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