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플레이리스트 #15
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중학생 여자아이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후지이 이츠키. 폭설이 가득 내린 오타루의 산을, 이츠키는 장난스럽게 미끄러지듯 내려온다. 그러다 빙판 안에 꽁꽁 언 채 박제돼 있는 잠자리의 사체를 본다. 그제야 이츠키는 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한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1995년작 ‘러브레터’는 일본 개봉 이후 4년이나 지난 1999년에야 한국 극장에 걸릴 수 있었다. 그 이전까지는 아직 우리나라에서 일본 영화가 정식으로 상영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4년이 지난 뒤에 개봉했어도 이 작품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러브레터’는 일본 실사영화로는 이례적인 115만명의 관객을 한국에서 동원했다. 화제성 측면에선 오히려 일본에서보다 더 큰 임팩트를 남겼고, 오로지 ‘러브레터’만이 가질 수 있는 감성의 어떤 권위를 획득했다. 김종관 감독의 단편영화 ‘폴라로이드 작동법’이나 2019년 개봉한 임대형 감독의 ‘윤희에게’를 보면 ‘러브레터’에 대한 애정은 물론 존경심까지 묻어난다.
이 영화가 이토록 많은 이들을 오랫동안 매료시키는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눈 내린 오타루의 풍경을 아름답게 담아낸 영상, 듣는 이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음악, 1인 2역을 훌륭하게 연기한 나카야마 미호 등 눈에 보이는 장점만을 거론하기에도 두손이 바쁘다.
그러나 ‘러브레터’의 진짜 매력은 역시 캐릭터에게서 비롯된다. 더 정확히는 그 캐릭터들이 담고 있는 각자의 ‘속사정’이야말로 이 영화의 진짜 매력이다. 영화를 다시 볼 때마다 새롭게 발견되는 각자의 비밀들은 작품의 깊이와 애틋함을 더하고, 나아가 우리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보게 만든다.
이야기의 시작은 동명이인이라는 해프닝에서 비롯된다. 한 학급에 후지이 이츠키라는, 한자까지 똑같은 동명이인이 배정된다. 성별이 다르기까지 해서 이들은 단숨에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다.
주목을 받는 게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 둘은 자꾸 엮이지만 감정은 꼬여만 가고, 둘 사이의 어색함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츤데레’가 될 수밖에 없었던 채로 중학생 시절이 그렇게 끝나버린다.
그 이후 어른이 된 남자 이츠키는 중학생 시절의 여자 이츠키와 놀라울 정도로 닮은 모습의 와타나베 히로코를 만나 단번에 사랑에 빠진다. 둘은 결혼까지 약속하는 관계로 발전하지만, 이츠키는 설산에서 조난을 당해 세상을 떠나고 만다.
혼자 남은 히로코는 사체조차 찾지 못한 이 죽음을 쉬이 받아들일 수 없고, 중학교 졸업앨범에서 이츠키의 옛 주소를 찾아내 마치 기도문을 올리듯 편지를 띄운다.
이 편지가 동명이인인 여자 이츠키에게로 배달되면서 두 여자의 기묘한 펜팔이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얼음 속에 꽁꽁 묻혀있었던 달콤씁쓸한 비밀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남자 이츠키라는 공통분모를 중심으로 히로코와 여자 이츠키는 오랫동안 묻혀 있었던 각자의 진실들을 마주한다.
히로코는 자신이 그저 여자 이츠키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을 받은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으로 슬픔과 질투를 느낀다. 여자 이츠키는 남자 이츠키의 존재조차 잊고 있었지만, 과거를 돌이켜보는 과정에서 점점 자신의 망각된 마음들이 소환되는 것을 본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트라우마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이츠키의 주변 인물들 역시 많은 속사정을 가진 채 살아가고 있었음이 발견된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모든 인물들이 갖고 있는 비밀들을 하나하나 성실하게 조명한다. 이 진실의 규명 작업은 이츠키의 목숨을 앗아간 설산을 향해 히로코가 “오겡키데스카?”를 외치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히로코가 하늘에 보내는 주문과도 같은 이 안부인사는 히로코 자신은 물론 히로코를 짝사랑하는 아키바 선배, 그리고 히로코와의 편지를 통해 과거의 자신에 대해 더욱 잘 알게 된 여자 이츠키에게도 가 닿는다.
설산 장면은 단순히 시각적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단번에 폭발시키는 명장면이다. 꽁꽁 얼어있는 설산은 우리의 인생이다. 이 안에 우리의 과거가 마치 얼음 속 잠자리처럼 박제돼 있다. 많은 부분들이 설명되지 않고 해명되지 않은 채 그저 얼어있다.
이 기억 위를 덮는 것은 시간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얼음 위에는 눈이 덮이듯 시간이 덮인다. 이 과정에서 기억은 왜곡되고 망각되고 편집된다. 그렇기에 평소에는 얼음 속 잠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인생을 살다 보면 빛의 순간이 오게 마련이다. 히로코가 설산을 향해 이츠키의 안부를 물었던 때는 해돋이 시간이었다. 태양빛이 눈과 얼음에 닿아 그들을 녹일 때, 비로소 우리는 얼음 속 잠자리를 다시 만날 수 있다.
이는 해명과 규명의 시간인 동시에 '힐링'의 시간이며, 물음표인 채로 묻히고 망각됐던 수많은 과거들이 느낌표로 바뀌는 절정의 순간이다.
얼음과 눈이 녹는 건 그저 행복하기만 한 과정은 아니다. 이 과정은 고통과 슬픔을 수반한다. 상온으로 나온 잠자리의 사체는 자연의 섭리 속에서 부패를 시작할 것이고, 우리는 그 잠자리를 이제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럼에도 이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예이츠의 시가 노래했듯 “지나간, 지나가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것들(what is past, or passing, or to come)”을 직면하며 우리 인생도 그렇게 다음으로 흘러간다. 얼음과 눈과 빛의 노래를 부르면서, 과거와 미래의 나 자신에게 때때로 안부 인사를 띄우면서, 그렇게.
영화 발골방송 '호우시절'에서 《러브레터》를 리뷰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