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플레이리스트 #16
모든 트렌드는 상반된다. 하나의 트렌드가 유행을 타면 정반대의 카운터 트렌드(counter-trend)도 같이 탄력을 받는다. 세계화는 지역화와 함께 진행된다. 한쪽에서 디지털이 유행하면 다른 한쪽에선 아날로그가 반응을 얻는다. K팝의 시대, 모든 사람이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는 것 같지만 2020년 한국에서 LP시장은 70%가 넘는 성장세를 보였다.
TV를 켜보자. 현 시점 한국 예능의 트렌드에도 상반된 두 흐름이 존재한다. 하나는 관찰형 예능이다. 누군가의 방안에 카메라를 설치해 두고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는 것이다. 이때 촬영의 피사체가 되는 것은 평소엔 화려한 조명을 받는 스타들이다. 시청자들은 그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며 위로와 공감을 얻는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네."
다른 트렌드는 참견형 예능이다. 이 경우 주인공은 대부분 (소위) 일반인이다. 심각한 고민을 가진 시청자가 카운슬러를 자처한 유명인들에게 자기 사연을 들려준다. 필요하다면 재연 화면도 등장한다. 화면을 본 패널들은 각자 자신의 관점에서 ‘일해라 절해라’를 한다. '연애의 참견' 같은 프로그램은 아예 헤어져라 말아라까지 조언해준다.
흥미로운 것은 두 가지 상반된 흐름이 결국 하나의 큰 흐름으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두 가지 트렌드의 한국 예능들이 하고자 하는 말은 결국 다음의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당신 자신을 사랑하라(Love yourself). 그리고 당신 자신이 되어라(Be yourself).
Love Yourself, Be Yourself
이 문장들은 우리의 현재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이다. 테스형(소크라테스)이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면 2020년대는 우리에게 "너 자신이 돼라"고 말하고 있다.
연애문제를 다루는 참견형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문장은 거의 격언 수준의 설득력을 획득했다. 그 누구도 자신을 상처 주도록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언도 자주 나온다. 상처를 받는 걸 허락하느니 차라리 헤어지는 게 낫다는 결론 또한 거의 매회 반복된다.
여기에 출연한 패널들의 모습은 가끔 교통사고 과실비율을 산정하는 보험회사 직원들 같다. 아주 예리하게 손해 본 부분을 산정하고, 개선 가능성을 타진한 뒤, 냉철하게 결론을 내리기 때문이다.
그러한 매력으로 '연애의 참견' 같은 프로그램은 시즌3까지 제작될 만큼 큰 인기를 얻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말해준다: ①패널들의 조언이 정확하고 유능하며 예리하다는 것 ②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
답을 알아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미셸 공드리 감독의 2004년작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이 상상하는 미래는 바로 이 '연애사고'의 과실비율을 산정하는 사람들이 지향하는 방향과 시작점을 공유한다.
우리의 인생은 때때로 상처와 얼룩으로 점철된다. 타인들에 의해 받은 상처의 총합인 이 얼룩들은 우리의 인생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영화 속 라쿠나사(社)의 발상은 여기에서 한 걸음을 더 나간다. 만약 과학기술을 이용해 이 얼룩들을 제거할 수 있다면 어떨까? 그럼 우리의 삶은 이전보다 더 나아지지 않을까? 얼룩과 함께 우리의 실수들도 함께 사라진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일도 좀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너무나 매력적인, 하지만 자기와는 너무나 다른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을 만나 2년간 연애하며 영혼이 너덜너덜해진 남자 조엘(짐 캐리)은 라쿠나가 건넨 이 잔을 받는다. 그의 마음엔 얼룩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억을 삭제하기 위해 스스로 기억을 도둑맞길 자처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이 기억삭제 작업 - 라쿠나가 건넨 잔은 독이 든 성배였음이 드러난다.
조엘이 이미 마셔버린 독은 꿈으로 표출되는 기억 속 조엘-클레멘타인 커플을 위협한다. 이들은 한순간에 무너지는 기억 속을 도망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끊임없이 도망을 가야 한다는 불안감보다 더 큰 것은, 이 모든 과정이 끝나고 나면 모든 기억이 소멸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조엘은 그토록 없애고 싶었던 얼룩을 왜 다시 지키고 싶어진 걸까?
정말로 망각한 자에게 복이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힌트는 영화의 첫 장면, 그러니까 클레멘타인과 관련된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조엘의 모습을 비추는 시퀀스에서 드러난다. 조엘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몬탁행 열차를 탄다. 그리고 다시 클레멘타인을 만난다. 이때 조엘은 미국인이라면 절대 모를 수가 없는 '클레멘타인'이라는 노래를 기억하지 못한다.
이 영화가 여주인공의 이름을 클레멘타인으로 설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삭제하면 어릴 때부터 수백 번도 넘게 따라 부르던 멜로디도 함께 날아간다는 사실을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 라쿠나사를 창립한 하워드 박사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던 메리(커스틴 던스트)는 영화 속에서 니체의 '선악을 넘어서'를 인용했다.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하지만 우리는 이내 깨닫는다. 망각은 실수와 함께 우리 인생의 일부를 함께 날려버린다는 것을. 사실은 그 실수가 우리의 삶이었다는 것을. 풀이과정의 일부가 삭제돼버린 추론을, 그저 정답만 맞았다고 해서 인정해줄 수 있을까?
얼룩에서 '무늬'로
다시 2020년대의 시대정신 문제로 돌아오자. 남 눈치 보지 않고 스스로를 존중하는 삶을 사는 것은 우리 모두가 지향해 마땅한 삶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만 온 세상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도 '정답'이다. 너무도 많은 매체에서 반복된 탓에 이제 이 정답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정답을 알았다고 해서 우리 삶이 곧장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자살률을 보면 Love Yourself의 정반대 상황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적절해 보인다. 인생의 정답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수도 없이 외치고 있는데도 왜 달라지는 게 없는 걸까?
인생은 결과보다 과정이기 때문이다. 수능시험 수리영역의 맨 마지막 4점짜리 문항의 답이 0 아니면 1이라는 걸 안다 해도, 풀이과정을 모른다면 그 문제를 풀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정답을 알아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핵심은 언제나 '어떻게'다. 우리는 어떻게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우리는 나 자신이 될 수 있을까?
'이터널 선샤인'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필연적으로 남기게 되는 얼룩들이야말로 그 풀이과정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영화의 제목은 알렉산더 포프의 시구에서 비롯됐는데, 원래의 제목은 '얼룩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살(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이다.
사실은 한국 제목에서 삭제된 부분이 핵심이다. 햇살이 아무리 영원하다 한들, 그게 얼룩 하나 없는 우리의 마음을 비춘다면 우리의 인생은 그저 과거의 반복일 뿐이다. 기억을 지운 뒤에도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서로를 발견하고 결국 다시 호감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기억을 없애도 우리는 우리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만, 그래서 우리는 우리답다.
우리 인생이 과거보다 나아질 가능성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얼룩을 없애는 기술이 아니다. 달콤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그 얼룩을 자기만의 색채를 가진 '무늬'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바로 인생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혼자가 아닌 함께 해나가는 것, 때로는 손해도 보고 상처도 받으며 해 나가는 모든 국면을 행복이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재회한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헤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그건 모를 일이다. 관건은 그들이 만들어 가는 무늬에 달려있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는 우리가 만드는 트렌드처럼 때때로 상반되고 모순되지만, 그 달콤씁쓸한 얼룩에 햇살이 비칠 때 우리는 서로를 보며 서로만이 알아챌 수 있는 미소를 짓는다. 그걸로 충분하다.
영화 발골방송 '호우시절'에서 《이터널 선샤인》을 리뷰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