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라면을 끓이며>
이 섬을 드나드는 빛은 비스듬하다. 아침의 빛은 멀리서 오고 저녁의 빛은 느리게 물러가서 하루의 시간은 헐겁고 느슨하다. 이 섬의 빛은 어둠과 대척을 이루지 않는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지 않고 어둠이 빛을 걷어가지 않는다. 빛과 어둠은 지속되는 시간의 가루들을 서로 삼투시키가면서 교차되는데, 그 흐름 속에 시간과 공간은 풀어져서 섞여 있다. 어둠에 포개지는 빛이 비스듬이 기울 때 풍경은 멀고 깊은 안쪽을 드러낸다. 빛은 공간에 가득 차지만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빈 것을 빈 것으로 채워가면서 명멸한다. 만조의 바다위에 내리는 빛은 먼 수평선 쪽이 더 찬란하다. 그 먼 빛들의 나라로 들어가면 그 나라의 빛은 더 먼 나라에서 빛나고 있을 터이다. 그래서 빛의 나라는 무진강산이다. 밀물은 마을 앞 방조제 턱밑까지 바싹 달려들고 썰물의 갯벌은 수평선에 포개진다. 빛은 물 위에 내려앉지만 물을 디디지는 않는다. 밀물 때 먼 나라의 빛들은 물에 실려서 섬으로 돌아오고, 물이 빠지면 붉은 석양의 조각들이 갯벌 위에 떨어져 퍼덕거린다. 이 섬에서는 빛이 공간 속을 드나드는 모습과 바닷물이 시간속을 드나드는 모습이 닮아 있다. 이 흐름 속에서 시간과 공간, 어둠과 밝음, 채움과 비움처럼, 인간이 세계의 골격으로 설정해 놓은 개념들은 스스로 소멸한다. 개념들이 소멸할 때 그 개념에 해당하는 실체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거나 아직 확보되지 않았다는 것을 겨우 알게 되는데, 이러한 저녁의 자유는 난감하다. 김훈 <라면을 끓이며> 중 '바다'
'빛은 비스듬하다', '헐겁고 느슨하다', '대척을 이루지 않는다',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걷어가지', '시간의 가루들을 서로 삼투시키며' '시간과 공간은 풀어져서' '안쪽을 드러낸다' .... 모든 문장에 밑줄을 긋고 싶다. 해지는 해안가 풍경은 김훈의 언어를 통해 재구성된다. 그 풍경속에서 인간과 철새와 바닷물과 시간과 공간은 시원의 상태로 합일을 이룬다. 김훈은 사실화를 그리면서 추상을 표현한다. '인간이 세계의 골격으로 설정해 놓은 개념들은 스스로 소멸한다' 전율을 일으키는 문장이다. 자연앞에서 언어는 무력하고, 언어로 존재의 집을 짓는 인간은 무용한 개념과 함께 스스로 소멸할 뿐이다. 사물에 직접 닿으려는 그의 글은 아름답고 서늘하다. 난 김훈의 글이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