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북부 산악지대의 작은 마을, 박하(Bac Ha). 처음 들었을 때는 '박하(薄荷) 사탕'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그 박하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곳의 중국어 명칭은 북하(北河)로 베트남어를 한자음으로 음차 한 발음이다. 이곳은 하노이처럼 분주하지도, 경기도 다낭처럼 관광객으로 북적이지도 않다. 다만 이곳에 가려면 좀 복잡하다. 박하를 가기 위해선 우선 하노이에서 야간버스를 타고 사파(Sapa)까지 이동해야 한다. 여행자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버스는 사오비엣(Sao Viet)이라는 회사의 슬리핑 버스이다. 버스는 아담한 동남아인 체구에 맞는데 키가 큰 사람이나 덩치가 큰 서양인들에게는 다소 비좁아서 몸을 전부 펼 수 없는 단점이 있다. 나는 키가 작은 편이라 바지를 살 때마다 수선을 하는 등 항상 추가 비용이 들어서 괜히 손해를 본다는 느낌이 많은데, 동남아에서 야간버스를 탈 때에는 이런 단신(短身)의 이점을 독특히 누린다.
한 10시간쯤 버스를 타고 갔을까? 하노이에서 출발한 야간 버스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사파에 도착한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것은 자욱한 안개이다. 이처럼 안개가 많은 곳을 방문해 본 적이 없다. 영화 미스트의 한 장면처럼 안개로 인해 시야가 아주 좁아져서 반경 50m 앞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는 도저히 운전할 엄두를 내지 못하겠다. 지나가는 차들도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그러나 안개가 조금 겉히고 나자 보이는 모습은 마치 무릉도원이다. 날씨가 맑은 날엔 계단식 논이 끝없이 펼쳐지고, 흐린 날엔 온 마을이 안갯속에 잠겨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든다. 여기에는 몽족, 자오족 같은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모여 살고 있다. 사파만 해도 3~4일은 머물만한 가치가 있는 충분히 매력적인 여행지다. 그러나 이번 여행의 목적은 박하이다. 박하로 가려면 교통이 다소 불편한데 중심가인 성당쪽에서 '라오까이' 라는 곳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데 총 2시간 정도 걸린다. 개발 도상국의 시골이 으레 그렇듯 버스 시간표도 나와있지 않고 주변인들에게 물어봐도 모르는 경우가 많고 영어도 잘 통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 또한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그렇듯 현지 여행사의 원데이투어를 이용했다. 아침 일찍 출발해서 반나절 시장을 둘러보고, 늦은 오후에 다시 사파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조금 힘들긴 했지만, 혼자서 가는 것보단 훨씬 편했고, 결과적으로 꽤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시장을 둘려보고 현지 마을에서 전통주도 맛보는 등 꽤나 알찬 프로그램이다. 영어가 능통한 현지 가이드가 동반하며 팁은 자유이다.
여행자들이 박하를 찾은 이유는 단 하나. 바로 매주 일요일 아침에만 열리는 ‘박하 시장’ 때문이다. 이곳은 평소에는 조용한 곳이지만 일요일만 되면 내국인, 외국인 할 것 없이 북적거린다. 이 시장은 단순한 농산물 장터가 아니다. 생활, 문화, 전통이 어우러진 살아 있는 민속 박물관에 가깝다. 이곳은 북부 베트남의 다양한 소수민족, 특히 꽃 몽족, 블랙 자오, 따이족 등이 주로 모여 사는 지역이다.
시장이 열리는 아침, 박하의 중심 거리는 수백 명의 상인들과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형형색색의 옷, 수 놓인 앞치마, 아이를 업은 어머니들,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풍겨오는 음식 냄새까지 모든 것이 이국적이다. 정말 여행을 왔구나 하는 실감이 든다. 시장 구경만으로도 반나절이 후딱 간다. 하노이에서 10시간 걸려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서는 정말 다양한 것들이 팔린다. 야채, 과일, 전통 약초, 수공예품은 물론이고, 가축 시장도 함께 열린다. 소, 돼지, 닭, 말, 염소 그리고 갓 태어난 강아지까지 있다. 시장 곳곳엔 국수, 찹쌀떡, 숯불구이 꼬치 같은 간단한 길거리 음식도 팔리고 있었다. 한 곳에서는 말고기로 만든 국밥도 팔고 있었다. 한번 먹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금액이 꽤 비쌌다. 점심은 따로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시장 안에서 가장 북적이는 국숫집에 자리를 잡았다. 저렴하지만 깊은 맛의 쌀국수 한 그릇과 함께 박하의 공기를 천천히 들이켰다. 점심을 먹고 다시 시장을 구경한다.
직접 실로 만든 수공예품을 파는 할머니, 전통 빵으로 보이는 것을 파는 아주머니, 기계로 직접 옷감을 짜는 여성들, 아이들과 함께 장을 보러 나온 가족 등등.. 굳이 물건을 사지 않더라도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주머니 사정이 열약하지 않다면 기념품 한두 개 사는 것도 좋다. 나는 어느 한 할머니가 파는 에코백을 샀다. 물론 적당한 흥정을 하되 과하게 가격을 깎지 않으면서
한편, 박하 시장도 변화의 물결을 피할 수 없었다. 소수의 여행 마니아들만 찾던 이곳은 블로그, SNS, 유튜브 등 각종 매체에 '숨은 보석 같은 곳' 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서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고 이제는 더 이상 숨겨진 공간이 아니게 되었다. 이에 맞춰 상인들도 예전에는 일상생활에 쓰이는 그릇, 바구니와 같은 물품을 팔았다면 지금은 외국인을 겨냥한 기념품, 자수 가방, 장식품 등을 진열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생활용품보다는 사진 찍기 좋은 물건들이 더 많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예전 같지 않다”, “이제는 너무 관광지 같아졌다”라고. 사실 나도 처음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잘 만들어진 세트장 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나 이 생각은 곧 바뀌었다. 우리는 최신 스마트폰을 사용하며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반면, 그들은 '변하지 않고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길' 바라는 건 일방적인 마음이 아닐까. 그건 어쩌면,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그들의 삶을 예전과 같기를 바라는 이기심일 것이다. 그들도 생계를 유지하고, 변화가는 소비자의 취향에 맞춰가며,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대의 흐름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과거의 모습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또 다른 형태로 적응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박하는 정말 꼭 가볼 만한 곳일까? 베트남 북부 여행 중에 하루쯤, 박하에 시간을 써볼 생각이 있는가? 그렇다면 내 대답은 망설임 없이 YES이다. 물론 교통은 그리 편하지 않다. 야간 버스를 타고 장시간 이동해야 하고, 당일치기 투어는 생각보다 빠듯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시장을 둘러보는 시간도 여유롭진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하는 충분히 가볼 만한 가치가 있다. 박하 시장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전통 의상을 입은 소수민족들이다. 알록달록한 옷감 사이를 걷고, 아넥네들의 웃음소리,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현지 음식 냄새가 뒤섞인 그곳을 걷다 보면 ‘내가 지금 꽤 멋진 경험을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휴양이나 호캉스가 아니라 살아있는 박물관과 사람 사는 모습이 보고 싶다면 꼭 한 번 가보기를 추천하고 싶다.
- 2023년 연말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