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동남아 지역에 거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발달되어 있고, 전반적으로 얼마나 살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물론 한국에서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고 노숙자들도 있으며 쪽방촌에서 어려운 분들도 있다. 지금은 잘 쓰지 않지만 전에는 '헬조선'이라는 자조적인 표현도 흔하게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외부의 시선으로 보면 한국은 여전히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다. 특히 많은 동남아시아 사람들에게 한국은 기회의 땅, '꿈의 나라'이다. 한류 문화와 경제 성장, 교육 수준, 사회 인프라 등 여러 면에서 한국은 이 지역 청년들에게 이상적인 삶의 모델로 비치고 있다.
태국은 동남아에서 말레이시아와 함께 비교적 잘 사는 편에 속하는 중진국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약 8천 달러 수준으로 한국보다 4배 적다. 단순 수치로만 계산하면 한국에서 일을 한다면 태국보다 4배나 높은 소득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태국에서도 단순 노동이나 건설 현장에서는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에서 온 노동자들이 일을 한다. 그 나라에서는 태국에서 일하는 것이 자기네 나라보다 '2배나 더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기회의 땅인 셈이다. 우리가 봤을 때는 태국이나 라오스나, 캄보디아가 별 차이가 없을지 모르겠지만 소득 격차를 생각한다면 노동은 자본이 몰리는 곳으로 가기 마련이니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태국에서 일할 때 평범한 현지 사람들이 '한국에 가서 일을 하고 싶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태국에서는 한 달에 기껏 해봐야 2만 바트, 한국 돈 80만 원 정도밖에 받지 못하지만 한국의 딸기농장이나 공장에서 일을 하면 300만 원은 받기 때문이다. 한국과 경제력이 4배나 차이나는 태국 사람들이 이러한데, 그렇다면 경제력 10배 이상이 나는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와 8배 차이나는 베트남에서는 오죽할까? 한국에서 3년 빠짝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모으면 고국에 돌아가서 번듯한 가게 하나 차려서 지방에서 여유롭게 살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어떤 일을 하든지 최저임금 수준만 받더라도 한 달에 약 실수령 250만 원 정도는 벌 수 있다. 물론 이 금액이 넉넉한 것은 아니고, 가족을 부양하기에도 빠듯한 수준이며, 노후를 대비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일 수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삶은 영위할 수 있다. 겨울에 추위를 피하고 여름에는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작은 집에서 살며, 하루 세끼 굶지 않고 밥을 먹고, 중고차 한 대 정도는 유지할 수 있다. 주말이면 동네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도 즐길 수 있고, 멀리는 못 가더라도 계절마다 근교 여행 정도는 다녀올 수 있다.
미혼의 경우 절약을 잘하고 소비통제를 하면서 부모님에 얹혀산다는 것을 가정하면 한 달 150만 원으로 생활하고 100만 원씩 저축하여 1년에 1,200만 원을 모을 수도 있다. 그 돈을 S&P500 같은 곳에 투자하면 복리 효과로 7년 안에 1억 원을 모을 수도 있다. 인플레이션로 인해 1억이 예전 같지가 않다고 하더라도 그 돈으로 작은 1인 창업 등을 시도하거나, 지방 아파트 갭투자 등으로 더 나은 삶의 기회를 모색해 볼 수도 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이론상 가능성일 뿐이고, 현실에서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많아 결코 쉽지는 않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최소한 그런 '가능성' 자체는 열려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동남아 여러 국가의 현실과 비교할 때 아주 큰 차이점이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태국을 예로 들어보겠다. 상류층을 제외한 대부분 서민들의 월급은 한 달에 40만~60만 원 수준이다. 방 한 칸 월세로 10만 원가량 내고, 오토바이 한 대로 이동하며 생계를 유지하려면 생활비가 빠듯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물가도 생각보다 높다. 많은 분들이 여행객 기준의 물가만 보고 동남아가 싸다고 느끼지만, 실제로 현지 서민들이 체감하는 생계비는 결코 낮지 않다. 한 달에 50만 원을 벌면, 그걸로 겨우 한 달을 연명하고 나면 남는 게 없다. 저축은커녕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조차 쉽지 않다. 동남아 사람들이 저축을 못한다고 욕할게 못된다. 월급 자체가 밥만 먹고 나면 0원이 되니까.
태국 수도 방콕은 인구 9천만 명 중에서 비공식 포함하여 약 1200만 명이 살고 있어 대한민국 서울 못지않게 혼잡하다. 태국 제2도시 치앙마이의 인구가 20만 명이니 안 봐도 뻔하다. 지방에서는 번듯한 일자리가 없다 보니 젊은 사람은 물론 중장년층도 방콕으로 온다. 그러다 보니 방콕의 집값은 비싸고 물가도 비싸기 마련이다.
태국의 이런 경제 구조의 배경에는 여러 요소가 있다. 우선 1년에 3 모작이 가능한 환경이라 굶어 죽을 걱정이 없었다. 또한 역사적으로 근대 국가를 만든 것이 늦어 은행 제도가 미흡했고, 풍부한 자연 덕분에 그날그날 먹고사는 문화가 자리 잡아 저축과 장기 계획에 익숙하지 않은 점도 있다. 특히 태국은 인구가 약 9천만 명에 달하고, 화교들이 경제를 주도하고 있다. 1조 원 이상의 자산을 가진 초부자 수는 한국보다도 많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소수의 상류층, 이른바 ‘하이소’는 일반 서민들과 철저히 분리된 삶을 살고 있다. 실질적으로 같은 사회에 속해 있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사는 셈이다.
1인당 소득 8천 달러의 태국이 이렇다면 이보다 더 가난한 다른 동남아 국가들은 더 상황이 안 좋다. 예를 들어 2022년 나는 태국에서 미얀마를 9일 동안 여행을 했다. 당시는 코로나로 봉쇄되었던 국경이 열린 지 얼마 안 되었던 시점이었다. 미얀마로 여행 가기 위해서는 출국 전 방콕의 병원에서 코로나 검사를 해야 했고, 미얀마 양곤에 도착해서는 현지에서 또 코로나 검사를 했다. 비행기삯이 방콕-양곤 20만 원이었는데 코로나 2회 검사 비용만 6만 원이 들었다.
코로나로 국경이 개방된 지 한 달도 안 되었고 당시 또 미얀마 군부 쿠데타로 관광객은 거의 없었다. 여행을 다니면서 한국인은 물론 일본인과 그 흔한 중국인도 못 봤고 서양인은 더더욱 못 봤으니까 말이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인도네시아 보도부두르 사원과 더불어 세계 3대 사원인 바간에서 하루 관광객이 겨우 3~4명에 불과했다. (물론 덕분에 입장료도 안 내고 사람도 없고 여유롭게 잘 봤다. 입장료를 받는 인건비조차 아까워서 철수한 것임)
바간을 여행하고 미얀마 제2 도시인 만달레이로 갔다. 거기서 유명한 사원으로 갔는데 입장권을 팔고 있는 현지 직원이 영어로 내게 어디에서 왔냐고 물어보기에,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자기가 한국말을 할 줄 안다고 하여 잠시 대화를 했다. 이야기를 하고 보니 자기는 미얀마 만달레이에서 대학을 나온 20대 중반의 여성으로 한국이 좋아서 한국어를 별도로 공부를 했다고 했다. 한국어 구사 능력은 약 초중급 정도로 간단한 회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여행지에서 이렇게 현지인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아 우리는 잠시 시간을 내어 커피를 마시면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면서 페이스북 아이디를 교환했다. 태국에 다시 돌아와서도 며칠 동안 대화를 주고받았는데, 그 친구의 꿈이 한국에서 일하고 것이라고 하였다. 미얀마에서는 한 달 월급이 10만 원밖에 되지 않아 생계가 어려우며, 치안도 불안정하다는 것이다. 희망은 보이지 않고 물가는 매년 오른다고 말이다. 나 또한 미얀마의 실정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의 말이 와닿았다.
나는 그 친구를 한국에서 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그러나 결론은 미얀마 정부는 인신매매를 막기 위해 여성 노동자의 해외 송출을 금지하고 있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했다. 미얀마에 봉사활동을 다녀온 친구에게도 물어보고 여기저기 알아보니 한국으로 노동비자를 받아서 가는 경우는 모두 남성들이었다. 여성이 한국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는 유학비자로 한국에 가서 알음알음 일을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유가 애당초 유학비자를 갈 만한 사람들은 미얀마 상위 5%이다. 특수 기술을 가진 사람만 갈 수 있는 노동비자도 있었지만 이것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해당이 안 되었고 그나마 유일한 방법이 결혼비자였다. 내가 미혼이고 그 미얀마 친구의 경우 나이가 젊고 꽤 매력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결혼을 해줄 수는(?) 없으니까. 유일한 희망은 군사 정권이 빨리 무너지고 민주화 정권이 나타나서 나라 정책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미얀마의 봄은 언제 오려나..
이 친구 외에도, 여행 중 한국어를 할 줄 아는 현지인 몇 명을 더 만났는데, 그들 모두의 공통된 꿈은 ‘코리안 드림’이었다. 미얀마뿐만 아니라 라오스, 스리랑카 등등을 여행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미얀마에서는 한 달에 10만 원 벌기도 어려운 반면, 한국의 공장에 취업하면 최저임금으로도 200만 원 이상을 벌 수 있고, 야간 근무와 특근까지 하면 350만 원 이상도 가능하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대부분은 한국에 온 외국인 노동자들은 돈을 악착같이 모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350만 원을 벌면 250만 원을 저금한다. 미얀마에서 한 달 버는 수입의 무려 25배이다. 그렇게 3년간 일하면, 고향에 돌아가 작은 가게 하나 차릴 수 있을 정도의 자본이 생긴다.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스리랑카, 네팔 등도 국가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지만 10배 이상의 수입이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이해가 더 잘 된다. 만약 우리가 카타르 같은 나라에 갔을 때, 일은 힘들지만 한 달에 3,000만 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 기회를 마다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라도 당장 가서 시체 닦는 일이나 화장실 청소 같은 허드렛일을 하겠다. 한 달 월급 3,000만 원이라면 5년 빠짝 일한다면 인생을 바꿀 수 있으니까.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예전에 스리랑카를 여행했을 때, 한 게스트하우스 주인이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해서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알고 보니 그분은 한국에서 3년간 근무하고 돌아온 분이었다. 스리랑카도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나라이다. 평균 월급이 10만~15만 원 수준으로, 생계조차 위태로운 수준이다. 이분은 한국에서 열심히 일하고 모은 돈으로 고향에 돌아와 번듯한 게스트하우스를 차린 것이었다. 그게 바로 한국이 누군가에게는 인생 역전의 기회를 주는 나라라는 증거이다.
대한민국은 출산율이 세계 최저에 가깝고 자살률도 높은 등 단점도 많고 개선할 점도 많지만, 여전히 좋은 나라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앞으로 인류 역사에서 대한민국처럼 최빈국에서 단기간 선진국이 된 나라가 나올 수 없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오늘 당신이 술 한잔에 쓴 10만 원이, 지구 반대편 누군가에게는 한 달 치 월급일 수 있다. 우리가 가진 기회와 환경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때때로는 외부의 시선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상대적 박탈감이 아닌, 상대적 감사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 아닐까?
- 2023.04.24.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