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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반둥, 교과서 속 도시를 걷다

인도네시아로 가나요? 발리로 가나요?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이 있다. 만약 누군가가 프라하로 해외 파견을 간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이 “좋은 데로 가시네요”라며 부러워한다고 한다. 하지만 만약 “체코로 파견을 갑니다”라고 하면, 반응은 다소 시큰둥하다고 한다. 비슷한 이야기가 또 있다. “발리로 출장을 갑니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부럽네요, 좋은 곳 가시네요”라고 반응한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로 출장을 갑니다”라고 하면, 그냥 “동남아로 출장 가시는군요”라는 반응이 돌아온다.


프라하는 체코의 수도이고,, 발리도 인도네시아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인식은 다르다. 프라하 하면 많은 사람들은 전도연이 출연했던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을 떠올리며 낭만적인 유럽의 도시로 생각한다. 그러나 ‘체코’라고 하면, 구 소련권의 동유럽 어느 한 국가 정도로 바라본다. 인도네시아 역시 마찬가지이다. ‘발리’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하지원, 조인성, 소지섭 등이 출연한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을 떠올리면서 낭만적인 휴양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인도네시아’라고 하면 그냥 동남아시아에 있는 가난한 국가라고 생각을 한다.



인도네시아는 발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도네시아를 여행하는 사람들 중 90% 이상은 발리로 간다. 국내 서점에 가서 여행 가이드북을 찾아봐도 '발리'는 있지만 '인도네시아'는 없다. 인도네시아 육지를 여행하고자 한다면 론니 플래닛과 같은 해외 서적을 보거나 블로그 등의 정보를 찾아야 한다. 특히 수도 자카르타의 경우 한 나라의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여행지로서의 매력은 거의 없다 보니 출장으로 가거나 혹은 육지를 탐험하고자 하는 일부 호기심 많은 여행자를 제외하고는 거의 가지 않는다.


오늘 언급하고자 하는 지역은 발리가 아니다. 발리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글을 썼기 때문에 특색이 없을 것이다. 오늘 이야기를 할 곳은 바로 '반둥'이다. 반둥이라는 지명을 들어본 사람이 제법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중고등학교 때 세계사 시간에 '반둥 회의'라는 이름으로 접했다. 성인이 되고 난 후 여행을 좋아하게 되고 각 나라의 역사도 관심을 가지면서 그 지명을 또 접하게 되었다. 교과서의 표현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과 소련의 대립 속에서 제3세계 국가들이 독자적인 노선을 모색하고자 1955년에 회의를 열었는데, 그곳이 바로 인도네시아 반둥이라는 곳이었다. 역사책에 나오는 지명들이야 워낙 많지만 반둥이라는 곳은 이상하게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 역시 반둥을 여행지로 선택하게 되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이곳은 휴양 도시라고 되어 있지만 막상 정보를 찾아보면 여행 후기가 많지 않다. 아직까지 베트남, 태국 등에 비해서 우리에게 덜 알려져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도네시아는 다른 동남아들보다 아래쪽에 있어서 비행시간이 한국에서 7~8시간 등 꽤 걸린다. 이처럼 접근성도 떨어진다. 오히려 호주에서 가까워서 그곳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교과서에 나오는 지명을 걷다

반둥은 인도네시아 서부 자바의 주도로, 시 인구는 약 250만 명, 도시권 인구는 900만 명에 이르는 제3의 도시이다. 유럽 식민지 시절에는 '자바의 파리'라고 불렸을 정도로 휴양지로 인기가 높았다. 유럽인들이 여름을 피하려고 자카르타에서 이곳으로 올라와 머물렀다는 기록도 많다. 이곳의 장점은 수도에서 가깝다는 점인데 버스로 2시간 거리이기에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다. 멀리 떨어져 있었다면 나도 굳이 찾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3박 4일 혹은 4박 5일 동안 여행을 한다면, 자카르타-반둥-족자카르타(보로부두르 사원이 있는 지역) 순으로 일정을 짜는 것이 좋다.


시내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나 반둥 대모스크 같은 역사적 건물들이 있지만 그다지 특색이 있는 것은 아니며 가장 유명한 곳은 당시 회의가 열렸던 '아시아-아프리카 회의 박물관'이다. 그러나 생각보다 건물이 밋밋해서 인터넷으로 사진을 미리 보지 않는다면 지나치기 쉽다. 반둥의 거리를 걷다 보면, 마치 예전에 교과서에서 봤던 한 장면 속을 직접 걸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금은 그냥 평범한 인도네시아 한 도시처럼 보이지만, 예전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제3세계’라는 말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내가 걷는 길 하나하나가 특별하게 느껴진다.

s-인도네시아 55.JPG 당시 회의를 기념하는 건축물



그래서, 반둥은 여행할 만한가요?

2013년 유럽 발칸 반도에 있는 보스니아 사라예보를 여행한 적이 있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제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된 사건을 잘 알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세르비아의 극단적인 민족주의자에게 암살을 당한 곳이 바로 사라예보에 있는 라틴 다리이다. 현재 그곳에는 당시의 사건을 알리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 다리를 건너다보면 세계사 시간에 마르고 닳도록 배웠던 사라예보의 총성이 마치 머릿속에 들리는 듯하다.


누군가 나에게 “반둥은 여행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글쎄요”이다. 반둥은 휴양도시라고 하지만 '발리'라는 워낙 유명한 곳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밖이다. 교통이 편리하지만 관광지가 흩어져있어 여행하기가 편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교과서에서만 접했던 그 지명을 실제로 밟고 걸어본다는 것,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여행이 될 수도 있다. 전후 혼란했던 국제 정세를 떠올리면서 내가 만약 당시 한 나라의 지도자였다면 어떤 방향으로 나라 발전을 생각했을까. 여기 모인 사람들은 각자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었을까. 역사책에 등장하는 장소를 직접 찾는 것에서 만족을 얻는 여행자라면, 반둥은 나름의 가치를 가진 도시임에 틀림없다.

s-인도네시아 44.JPG 반둥 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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