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지도를 보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바다는 국경선처럼 선명하게 나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의 땅도 아닌데, 왜 특정 국가의 이름을 바다에 붙였을까? 가령 ‘동중국해(East China Sea)’, ‘남중국해(South China Sea)’, ‘타이만(Gulf of Thai)’ 같은 이름들은 자연 현상보다는 인간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더 많이 담고 있는 듯하다. 이런 명칭은 단순한 지리 정보 그 이상이다. 역사, 영토 분쟁, 해양 자원에 대한 권리 주장까지 복잡한 이해 관계가 얽혀 있다. 실제로 일부 국가들은 국제 사회에서 이런 명칭을 바꾸기 위해 수십 년째 외교전을 벌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아주 다른 시선으로 바다의 이름을 붙일 수는 없을까?
모든 바다가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니다. 불가리아 밑의 '흑해(Black Sea)' 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북쪽의 어두운 바다라 하여 ‘암흑의 바다’로 이름을 지었다. '지중해(Mediterranean Sea)'는 ‘육지 가운데 바다’라는 라틴어에서 따와서 지역명과는 거리가 있다. '태평양(Pacific)'도 '평온한 바다'라는 중립적인 말이다.
만약 바다 이름을 ‘정치적 색채’ 대신 ‘생태적 특징’이나 ‘보편적 자연 요소’로 바꾼다면 어떨까? 그 바다에서 많이 잡히는 물고기나, 자주 나타나는 기후, 혹은 해양 생물 등을 기준으로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타이만 → 고등어만 (Mackerel Gulf) : 실제로 고등어가 많이 잡히는 수역에서 착안
남중국해 → 산호해(Coral Sea) : 산호초와 열대 해양 생물이 풍부한 이 해역의 특징을 반영한 이름.
동중국해 → 해무해(Sea of Sea Fog) : 자주 안개가 끼고 흐린 날씨가 이어지는 해역.
베링해 → 바람해(Windy Sea) : 혹독한 기후와 거센 바람이 특징인 극지 근처의 바다.
노르웨이해 → 대구해(Cod Sea) : 세계적인 대구 어장으로 유명한 북유럽 해역.
발트해 → 안개해(Foggy Sea) : 잔잔하고 습한 기후로 유명한 유럽 북부의 내해.
하지만 이건 현실화되기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기존 명칭은 오랜 시간 축적된 국제 관행이다. 수백 년 동안 사용된 명칭은 항해, 지도 제작, 교육, 외교 문서 등에서 이미 깊이 뿌리내려 있다. 또한 이름은 권력이다. 지명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해당 국가의 영향력과 정체성을 상징한다. 이를 바꾸는 건 국가 이미지나 주권 문제와 직결된다. 미국이 '멕시코만'을 '미국만'으로 바꾸려는 것도 그 이유이다.
그리고 국제 합의가 어렵다. 유엔, IMO(국제해사기구) 같은 기관에서도 명칭을 바꾸는 건 매우 까다로운 절차다. 하나의 이름을 바꾸기 위해선 이해관계국들의 동의가 필요한데, 현실은 의견 충돌이 많다. 또 모호성과 혼란 가능성. '새우해'나 '해무해'처럼 생물이나 기후에 기반한 이름은 시적이긴 하지만, 명확성과 객관성 측면에서는 다소 추상적일 수 있다. 실제 항해나 과학적 자료에는 적합하지 않다.
물론 바다의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정치적 갈등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어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데 중요한 도구다. 이름을 바꾸면 그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바뀐다. 특정 국가의 입장에서 벗어나 ‘공통의 자산’으로 바다를 인식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상상이 아닐까? 이런 중립적 명칭은 아이들에게 지구를 가르칠 때도 유용할 수도 있다. ‘누구의 바다’가 아니라, ‘모두의 바다’라는 개념. '나'가 아닌 '우리'라는 인식. 바다는 누구의 것도 아니니까, 잠시나마 '모두의 언어'로 불러보는 상상. 정치는 내려놓고, 상상은 높이 띄워보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