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병동] 환자에게도 유지해야 할 일상이 있다
DSM-V 란?
정신과 진단 체계로, 각 질환들의 증상을 모아 누구나 같은 진단을 내릴 수 있도록 만든 정신의학의 교과서
C.C. : 17세 남, 조현병 환자, 여동생을 가위로 공격하라는 환청.
그 날 아침에 입원한 환자 중에, 눈에 띄는 환자가 있었다. 17세 조현병 환자 John, 환청으로 인해 여동생을 가위로 위협해서 입원하게 된 환자이다. 그 날 레지던트가 이 환자를 M 교수님 앞에서 환자를 인터뷰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약속했다. 외국인 학생인 나에게는 드물게 주어지는 좋은 기회였다.
M 교수님은 월요일 아침마다 회진 시간에 집단 인터뷰를 진행한다. 정신과 팀이 모두 둥그렇게 둘러 앉아 환자를 앞에 두고, 레지던트 한 명이 모두의 앞에서 환자를 면담 했다 (물론 사전 환자의 동의를 거친 후!). 면담이 끝나면 교수님과 팀원들이 한 마디 씩 면담 내용에 대해서 피드백을 주는 시간을 가졌다.
미리 가서 존에게 면담 동의 여부를 물었다. 존은 자기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가 거절하면 내 인터뷰 기회는 날아가 버린다. 당혹스러워 하는 내 표정을 보더니 고맙게도 그는 한 번 해보겠다며 마음을 바꿔주었다.
C.C. 는 chief complaint의 준말로, 환자가 호소하는 주요 증상을 말한다. 여기에 기본적인 환자 정보를 더해, 쉽게 환자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한 문장으로 소개한다.
제 증상은요, 비밀입니다.
면담 석에 앉은 그는 원망스러울 정도로 비협조적이었다. 어떤 목소리가 들렸냐는 질문에 그건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평소에 어떤 증상을 겪고 있냐는 질문에도 대답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충실한 정신과 수련생이 되고 싶었던 나는 DSM-V와 면담 가이드에 나오는 질문들을 그대로 읊었다.
"환청을 들은 적이 있나요? 어떤 내용의 환정인가요?"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거나, 자살 시도를 해본 일이 있나요?"
“자해 행위를 한 적이 있나요? 언제, 어떤 때 하고 싶은 마음이 드나요?”
"정신과 약물 이외에 다른 약물을 복용 중인가요?"
"우울하다는 생각이 드나요?"
"기분이 비정상 적으로 들뜨고 좋은 적이 있었나요?"
"가족 관계는 어떤가요? 부모님의 성격은 어떤 편이에요?"
"가족 중에 약물이나 알콜 중독을 앓은 사람이 있나요?"
"이전에 정신과 병동에 입원한 적이 있나요? 정신과 약물은 뭐를 복용했었나요?"
거의 대부분의 질문에 대답을 거부한 그는 다만 환청을 잠재울 약을 원한다고 했다. 원래 클로자핀 (clozapine)이라는 약물을 장기 복용하고 있던 안정적인 환자였는데, 이번에 약물 처방을 받는 일정이 늦어지면서 상태가 다시 악화된 케이스였다. 사실 그렇다, 이 환자는 그냥 원래 먹던 약이 필요한 환자였다. 환청의 내용이 뭐든간에 결국 치료는 같을 것이었다. 내 면담은 망했다. 새내기 정신과 수련 학생에게 이런 상황에 환자들과 어떤 이야기를 더 해야 하는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DSM-V 진단 기준 뒤에 사람이 있었다.
면담이 끝나고, 환자 방으로 그를 쫓아갔다. 그런 불편한 상황에 처하게 해서 미안했다고 사과를 구했다. 사실은 그가 안쓰러웠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 여동생을 직접 가위로 위협하는 내용의 망상을 고백하고 싶진 않았겠지.
대신 인류학도로서의 전공을 살려(혹은 그냥 남의 인생 이야기에 많은 오지라퍼로서), DSM-V 진단 기준을 벗어나, 그의 일상에 대해 물어보았다.
"너의 하루 일과는 어때? 매일매일 뭐하고 지내니?"
"학교는 다니고 있어? 친구들은?"
"심심하지는 않아? 취미생활은 없어?"
"커서는 뭐가 되고 싶니? 꿈은 없고?"
17세 조현병 환자로 동생을 공격하라는 환청을 듣는 환자였던 그가, 비디오 게임을 좋아하고 선생님이 되고 싶은 꿈 많은 청년으로 변해있었다. 예전에는 학교도 다니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겨했던 그이지만, 증상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이를 들킬까 두려워 학교도 그만두고 친구들과 연락도 끊겼다고 했다. 또래 아이들이 학교에서 어울릴 시간에 집에 혼자 남아 비디오 게임을 하는 그는 많이 외로워 하고 있었다. DSM-V 증상 바깥에 존의 삶이 있었다. 환청과 망상과 자살사고로 정의되는 정신과 환자 이기 이전에 그 또한 한 명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정신과 환자로서 일상 유지하기
정신과 약물보다 더 필요한 것은, 마음 깊은 이야기를 터놓을 수 있는 친구들이고, 선생님이라는 꿈을 향해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적 지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현병 증상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그의 삶이 멈추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담당 교수와 해당 케이스를 의논했고 우리는 그를 "Psychosocial Rehabilitation Center (심리사회재활센터)"에 연결해주기로 했다. 정신과 환자들이 치료 이후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약물 외적인 지원을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이 곳에서 환자들은 비슷한 경험을 가진 다른 조현병 환자들과 만나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이들은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하고, 지능 저하가 진행되어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은 돈을 세는 방법이나, 빨래, 청소 및 장을 보는 법 등 기본적인 일상 유지를 위한 활동들에 대한 훈련을 하기도 한다. 물론 존과 같이 젊은 환자들을 위한 교육 및 직업 수련 프로그램들도 있다.
정신과 의사가 병동에서 보는 환자들의 모습은 '급성기'의 모습이다. 환청에 시달리고, 망상에 사로잡혀 중얼거리면서 복도를 거니는 모습이다. 그렇지만, 그런 환자들도 안정을 회복하고, 증상이 진정되면 일상으로 돌아간다. 정신과 의사로서 우리는 그들이 일상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이들에게도 밥벌이를 걱정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친구들과 맥주 한잔 나누는 평범한 일상이 있을거란 짐작을 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보는 이들의 모습은, 무균실 같은 정신과 병동에서 하얀 환자복을 입고 하루 세번 챙겨주는 약을 꼬박꼬박 삼키는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그들이 평소에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퇴원해서 돌아갈 일상은 어떤 모습인지 알 길이 없었다. 어떤 환자들은 여러 불법약물에 중독되어 노숙자로 살고 있기도 했고, 그런 환자들의 경우 병원을 나서면 밤낮이고 목적지 없이 길거리를 헤매이다가 다시 입원하게 되겠거니 하는 안타까움이 들기도 했다. 어쨌든, 병원 바깥의 일상은 우리 영역이 아니었다.
Public Psychiatry / Community Psychiatry
이런 환자들을 겪으며 나는 Public/Community Psychiatry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Public Psychiatry나 Community psychiatry는 거의 같은 맥락의 뜻으로 사용되는데,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환자들을 중심으로 병동에서의 모습 뿐만 아니라 병동 바깥에서, 환자가 실제 살아가는 환경에의 개입의 중요성을 다루는 학문이다. 이를 recovery focused treatment (회복 중심 치료) 라고도 한다. 환자의 급한 증상 (자살사고, 환청, 망상 등)을 약물로 조절하는 것 뿐만 아니라, 급성기 증상 치료 이후 환자가 집으로 돌아가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구조적 지원이 필요하다. 다행스럽게도 존은 훌륭한 지지체계 (치료에 적극적인 부모님, 그의 안전과 숙면을 책임질 집, 필요한 만큼 약을 처방받고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의료보험, 치료와 교육을 원할 경우 받을 수 있는 경제적 상태)를 가지고 있었고, 일상 유지를 도와줄 심리사회재활센터에도 연걸시켜 줄 수 있었다.
누구나 도움이 필요하단다.
존은 병동에서 약 복용을 시작했고, 환청은 곧 사그라 들었다고 했다. 며칠이 지나자 그의 상태는 안정적으로 유지 되어 퇴원시킬 수 있었는데, 퇴원할때까지도 환청의 내용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도 안심이었다. 심리사회재활센터의 도움을 받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도 새로 사귀고,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을 향해 나아가렴!
딱 한 달 동안 그 병원에서 실습하기로 되어있는 나로서, 다시는 그를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다. 내가 실습을 도는 마지막 날, 한 레지던트가 내게 와 말했다. "존이 다시 왔어!" 그는 나와 존 사이에 특별한 라포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응급실에 있으니까 한번 가봐!"
마지막 퇴근을 준비하고 있던 나는, 만사 다 제쳐두고 응급실로 향했다. 그가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나도 반갑게 외쳤다, "이 녀석이 여길 왜 또 들어왔어!" 여전히 어떤 증상으로 병원에 오게 되었는지는 말하고 싶지 않아했다. 대신 나는 그에게 인생 선배로서의 조언을 해주기로 했다. 어차피 진료를 보러 간 것도 아니었다.
"있잖아,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누구나 도움을 필요로 한단다.
나 역시 지금은 의사로서 여기에 있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정말 많은 사람한테 도움을 받았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있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비결은, 다른 무엇보다도 주변에 조언을 구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던 덕분이야.
네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은, 네가 약하거나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야.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움을 필요로 해.
나랑 똑같이, 너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을거야
그 때 그걸 숨기거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이제 이곳을 떠난다고, 너를 보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해주었다. 그는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나는 병동에 있을 때, 선생님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지난 한 달 간의 수련이 의미있었던 것임을 알려주는, 너무나도 고마운 말이었다.
있잖아,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누구나 도움을 필요로 한단다.
네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은, 네가 약하거나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야.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움을 필요로 해.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모든 정신과 의사들의 글이 그렇듯, 여기에서도 역시,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환자의 개인정보들을 조금씩 바꾸어 적었음을 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