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ooin Jun 29. 2024

모든 사람은 신학자이며, 될 수 있고,그래야만 한다.

"모든 사람은 신학자이며, 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Everybody is(can and should be) a theologian. "


신학이란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언급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를 프롤레고메나Prolegomena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텐데, 이것보다 먼저 다루고 싶은 문제를 다루기 위해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신학(Theologia)은 신(Theos)에 대한 말(Logos)이라는 시니피앙(기표) 혹은 이름을 갖지만,

신학은 역설적으로 신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신학의 도구인 언어와 이성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난 것(das Ding)으로서, 초월적인 대상인 신에 대해 우리는 알 수 없다. 인식의 난관으로서 아포리아(aporia)가 늘 발생할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적 불가지론 혹은 부정신학적 태도가 적확한 것이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의 유명한 명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는 말과 다르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말"하고 싶어진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술과 다르게, 문학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욕망을 밀고가는 것으로서의 성격을 갖기 때문에 신학은 문학을 통해 이러한 아포리아를 해결해야 한다(break through). 그래서 신학은 은유적이어야 한다는 샐리 맥파규(Sallie McFague)의 주장은 의미를 갖는다. 내재성 혹은 유비적인 성격을 볼 때, 구성으로서 세계관은 은유적 다양성이 나타나야 하고, 나타날 수밖에 없다.  

즉, 불가지성 혹은 초월성은 언어의 한계를 벗어나기 때문에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말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 중 하나는, 모순적 개념의 대립을 통해 초월적인 것을 말하고자 하는 칼 바르트적 변증법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신학이 신에 대해서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도 신학은 유의미하다.

신학은 특수형이상학의 문제를 통해 자기자신에 대해 말하는 "행위"다. 자기고백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서 신학은 실존주의적이다. 나아가,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학은 세계관을 다룬다. 즉, 신학은 신학적 지식[theological studies, knowledge]가 아니라, 동사로서 신학[Theologisieren]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은 구성적(constructive)이며, 과정적(process)이다. 그래서 교조적인 교의학과 조직신학보다, 구성신학이라는 표현이 훨씬 신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신학의 동태적 성격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신학은 과정철학(process philosophy)의 성격을 갖는다.


'세계관(Weltanschauung)'이라는 단어는, 특히 한국에서는, 기독교 세계관 혹은 개혁파 세계관이라는 단어로 흔히 사용된다. 그래서 개신교적인(혹은 칼빈주의적인) 개념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이 용어는 칸트와 딜타이로부터 시작된 개념어다. 세계(Welt)에 대한 관점(Anschauung)으로서 세계관은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은 안경을 쓰지 않으면, 볼 수 없듯이 안경으로 비유될 수 있다(칼뱅이 기독교강요에서 성서를 안경에 비유한 것도 이와 유사한 맥락이다.) 세계관을 선천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선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안경을 쓰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지만, 안경쓴 사람은 안경을 통해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한편, 세계관을 일종의 신념체계(belief system)로서 사회적 구성물(social construction)이다. 왜냐하면, 사회화(socialization)문화화(culturalization)의 과정을 거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성주의적 성격 때문에 세계관은 선천적이라고 할 수 없다. (데카르트적인 본유관념, 혹은 플라톤적인 레테의 강을 잠시 내려놓자.) 하지만, 세계관은 경험에 선행한다. 특정 시점에서 어떤 경험(혹은 감각직관)은 특정한  해석되기 시작한다. 즉,  이해(understanding, 오성)을 기초로 하는 지식(이론)보다 세계관 형성이 선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관은 전이론적(pre-theoretical)이다. 신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이론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전이론적인 차원을 다루는 세계관이 신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지젝(Slavoj Žižek)의 말을 빌리면, 무신론자가 역설적으로 가장 충실한 유신론자다. 그래서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는 언술은 그 어떤 것보다 신학적인 진술이다. 니체의 주장은 20세기 중반 알타이저(Thomas J. J. Altizer)의 사신신학, 급진신학이 말하려는 것과 결이 다르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말을 통해 초월성을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루살로메의 진술처럼, 니체 사상은 종교성과 영성이 응축된 철학이었다. 무신론자로 오인받는 니체의 이 문장은, 특수형이상학 문제가 라깡적 '아버지의 법'으로 작용하는 지점을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신이 죽었다고 말하는 신학이 가능한 이유도, "신"이라는 것은 결국에 세계관의 은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세계관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신"은 모든 사람에 대한 은유이고, 신학은 모든 사람에 대한, 모든 사람에 의한 학문이 된다.


그래서 신학은 특수형이학 문제를 통해서 세계관을 다루는 학문이고, 세계관의 구성요소로서 존재론(ontology), 인식론(epistemology) 그리고 방법론(methodology)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존재와 인식 그리고 방법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인문(人文)"이라고 불러보자. 그렇다면, 그 깊이와 넓이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모든 사람은 신학을 하고 있다(Theologisieren)고 할 수 있다. 지식을 통해 학위를 받은 자가 아니라, 자신만의 세계관을 통해 살아가는 사람을 신학자(theologian)라고 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은 신학자이며, 신학자가 될 수 있고, 신학자가 되어야만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원죄의 기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