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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in Jul 06. 2024

질문에 대해 침묵하기


“만일 당신이 재즈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재즈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루이 암스트롱.


진리는, 답변의 형태가 아니라 물음의 형태로 되어 있다.

진리는 텅빈상태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고정된 상태면, 그건 진레가 아니고, 기표에 불과한 것. 미끌어지고, 상대적으로 오인되고, 왜곡되고, 가능성이 거세된 것이다. 진리는 자유케 하는 것이므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진리. 자유, 속박에서 벗어남이라고 본다면, 언어/기표/상징계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불온하고, 흔들리고, 의심의 해석학의 자리에 있고, 경계에 있는 것. 그래서 적대(hostility)감이 발생하지만, 그 자리에서 맞이함(hospitality)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곧 진리인 것이다. 이를 데리다적으로 보면,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환대(hostipitality)의 개념이 곧 진리인 것이다.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측면에서 선악 또는 의와 죄를 판명하는 기준이 곧 “진리”의 자리를 차지 한다. 이는  “율법”(혹은 “계명”) 이나 도덕법칙(칸트적 정언명령만을 의미하지 않더라도)의 형태로 드러난다.

ㅍ예를 들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법을 예수는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이는 비어 있는 진공상태의 법, 그 의미가 불확정적인 법이다.

추가적인 질문을 던져야 그 의미와 실천이 나오기 때문이다. 첫번째 질문은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지, 혹은 이웃의 범주를 어디까지 보아야하는지, 그 경계는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두번째 질문은, 사랑하는 행위의의미와 ‘내 몸과 같이’ 그 사랑을 한다는 것의 내용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존재적 측면에서, 인간은 신의 형상(Imago Dei)을 담지한다는 언술도 동일한 텅 빈 구조를 갖는다. 형상이 없는 신의 형상은, 가리워진 얼굴이다. 신의 형상을 공간으로 표현해내는 장치인 종교적인 공간으로서 성막은, 신의 공간을 커튼(휘장)에 가리워진 공간으로 설정한다.

인간이 신의 형상을 갖는다는 말은, 다음과 같이 환언할 수 있을 것이디. 텅 빈 존재로서의 인간, 상상과 환상을 통해 구성되는 인간, 그리고 환상 가로지르기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과정으로서 인간.


자유케 하는 것이 진리라고 하더라도, 자유는 동시에 우리를 도피하게 만드는 불안을 주기도 한다.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만드는 이데올로기와 환상은 “우상”이 다름 아니다.


어떤 답을 한들, 오답이 될 수밖에 없는 질문이 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떤 정해진 면을 포착한 문장은, 다른 면을 담아낼 수 없다. 그래서 시선을 고정하는 원근법이 대신에, 입체파적인 평면을 구사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질문들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내용이 되었건, 정답이 될 수 없고, 정답이 되어서도 안된다.

“신이란 무엇인가?”와 같이 초월자(tranzendenz)를 묻는 물음에 답을 하지 않는, 부정신학의 태도 또한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게 곧 진리가 존재하는 형태이다. 질문에 대한 답변보다, 그 질문 자체가 중요하고, 그 질문의 목소리, 동기, 맥락이 중요한 것이다. 답변 그 자체보다, 그러한 답변을 하기까지의 과정(process)이 갈무리며, 그  과정은 진리에 대한 근사치라고 할 수 있다.


답을 찾으려고 하면, 그리고 그 답에 근접하면, 기표로서 질문은 벗어나고 없다. (질문의 의도가 답을 내리는 데에 있지 않기 때문에, 답변은 질문의 목표점에서 벗어난다.) 설사 닿는다고 하더리도, 우리는 죽음을, 무를 경험한다. (답을 한다면, 그 답에 대한 질문은 이미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혹은 답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했기 때문에, 어떠한 의미도 없는 곳으로 회기하는 것이다.) 이는 구약에서 “성소에 들어가면, 죽게 된다”는 규율의 형태를 띤 환상으로 변환된다. 성소에는 휘장을 두르고, 성육신의 죽음을 휘장의 찢겨짐으로 보는 유비가 성립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리(참 지식 혹은 신)라는 것은, 삶에의 충동, 동시에 죽음의 충동도 갖는 양면적인 것으로,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변증법이 나타나는 장소이며, 그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장소는 폐허이며, 무의 상태이며, 이 모든 것이 쓰레기가 되는 변혁과 갱신의 자리이다. 즉, 무로부터의 시작(ex nihilo)만이 진리의 자리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은 사랑이다“(요일4:16)와 같이 순환논증의 말은, 선문답과 같이 변증법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키르케고르의 변증법이, 초월성을 강조하는 칼 바르트 신학(중에 변증법적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에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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