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포사이드, 이창동, 박찬욱 그리고 히로카즈
코레오그래피적 객체, 그리고 존재의 떨림
우리는 언제 존재하는가? 혹은 존재한다는 감각은 언제 우리를 찾아오는가? 그것은 단지 숨을 쉰다는 물리적인 조건을 의미하지 않는다. 존재는 때때로 말이 멎는 순간, 사유가 굳는 지점, 몸이 저릿하게 떨리는 그 빈틈에서야 비로소 감지된다. 존재란 정지된 형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감각의 어긋남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바로 그 발생의 순간, 우리는 떨린다. 이 떨림은 단지 감정의 반응이 아니라, 신체 전체에 걸쳐 일어나는 미세한 진동이며, 그것은 나라는 존재를 한 번 더 불러들이는 호출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떨림’은, 단지 감각의 진폭이 아니라 존재론의 문법이다.
이러한 떨림의 감각은 무용, 영화, 그리고 신학에서 동일하게 반복되며, 이 세 장르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존재의 진실’을 제시한다. 특히 코레오그래피적 객체(Choreographic object)의 개념은 존재와 움직임, 몸과 무대, 안무와 해석의 경계를 새롭게 설정하며 이 떨림의 장치를 형식화하는 예술적 장치로 작동한다.
코레오그래피적 객체란 무엇인가?
윌리엄 포사이드가 주창한 무용개념으로서 코레오그래피적 객체는 움직임을 지시하거나 제안하거나 불러일으키는 ‘구조물’이며, 반드시 무용수의 몸에 의해 표현되지 않더라도, 관람자(혹은 참여자)의 몸과 감각, 인식의 층위에서 ‘움직임의 논리’를 촉발시키는 안무의 잔여이자 기입이다. 이 객체는 대상이라기보다 과정이며, 상호작용을 통해 스스로 형식을 재구성한다. 물리적으로는 텍스트, 물체, 공간 설치, 혹은 특정 지시일 수 있지만, 그 본질은 타자를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다. 그것은 더 이상 무용수의 소유가 아니며, 보는 자의 몸에 안무가 ‘기입’되도록 요청하는 장치다.
다시 말해, 코레오그래피적 객체는 해석의 주체를 움직이는 주체로 전환시키는 힘을 갖는다. 이는 단순한 참여나 상호작용을 넘어, 존재 자체가 외부적 리듬에 의해 구조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각성하게 한다. 마치 신이 단지 멀리서 관조하는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안무 역시 더 이상 공연된 후 사라지는 형식이 아니라, 감각적 접촉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 객체는 움직임의 기하학이 아니라 존재의 문법을 다룬다.
이제,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영화 세 편을 다시 바라보자. 이창동의 <시>,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모두 코레오그래피적 객체로 작동한다. 이들은 ‘감상하는’ 영화가 아니라, 감각을 가동시키는 구성체이며, 우리는 그것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자기 존재의 리듬을 다시 묻는다.
이창동의 <시>에서, 미자는 시를 쓰는 법을 배우기 위해 아름다움을 보려 하지만, 그녀 앞에 나타나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잔혹한 사건의 잔재다. 시는 여기서 문학적 산물이 아니라 미자의 신체와 삶에 기입된 choreographic object다. 그녀는 시라는 대상 앞에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고, 이 고민은 곧 실존적 흔들림이 된다. 포사이드가 제안하는 choreographic object와 같이, 시는 그녀의 삶을 미세하게 다시 안무한다. 그녀는 말이 아니라 ‘떨림’으로 존재하기 시작한다.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는 어떤 인물도 단정지을 수 없는 타자성으로 작동한다. 형사 해준은 그녀를 분석하고 해석하려 하지만, 그 해석은 끊임없이 자신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해준은 서래의 몸짓, 말, 눈빛을 통해 단지 사건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추적하려 한다. 그는 서래를 단순히 대상화하거나 규정하려 하지 않는다. 서래는 해준에게 있어 choreographic object이다. 그녀는 ‘해석되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해준의 해석 자체를 붕괴시키는 존재다. 포사이드의 작품에서처럼, 객체는 단지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해석하는 자를 역으로 구성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혈연'이라는 견고한 믿음에 균열을 가하는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류타는 병원에서 바뀐 아이라는 충격적인 사실 앞에서, 아버지로서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흔들린다. 그는 법적 아버지도, 생물학적 아버지도 아니게 된 경계인으로서,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이 영화에서 떨림은 생물학과 윤리, 애정과 책임 사이에서 발생하는 결정 불가능성의 진동이다. 류타는 자신의 ‘존재론적 코레오그래피’를 다시 짜야만 한다. 아이를 어떻게 안을 것인지, 무슨 말로 다가설 것인지, 어떻게 아버지가 될 것인지. 그것은 포사이드의 choreographic object가 요구하는 수행과도 같다. 움직임의 반복, 실패, 그리고 다시 시도하는 시간 속에서 존재는 형태를 바꾼다.
포사이드의 작품 “Towards the Diagnostic Gaze”는 관객에게 매우 단순한 과제를 던진다. 깃털 먼지털이를 ‘전혀 움직이지 않도록’ 붙잡으라는 지시( “Hold the object absolutely still”). 그러나 이 수행은 단순하지 않다. 관객은 지시를 따르려 할수록 자신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절대적인 정지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감각하게 된다. 이 작업은 인간이 ‘움직이는 존재’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하며, 존재는 언제나 불완전한 정지와 영속적인 떨림 사이에서 유지된다는 역설을 드러낸다. 이 떨림은 단지 물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진동이라는 통찰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 떨림을 느낄 때 새로운 존재의 감각을 갱신하게 된다. 진동하는 존재로서 우리의 스스로를 자각한다. 포사이드의 개념을 빌려서 표현하면 우리는 코레오그래피적 존재인 것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구속(redemption)은 이러한 떨림의 극지에서 발생한다. 구속은 단지 죄의 용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가 자신의 가장 취약한 떨림과 마주하는 순간, 다시 말해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자기초월의 경험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론이 아니라 사건이다. '말씀'이 육화되는 그리스도 사건처럼, 진리는 개념이 아니라 ‘현존’의 방식으로 다가온다. 그 진리는 우리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떨림, 삶을 꿰뚫는 불완전한 관계, 실패로 이어지는 사랑, 반복되는 오해 속에서 출현한다. 과정신학이나 구성신학이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진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진동이며, 신은 완결된 존재가 아니라 존재들과 함께 끊임없이 생성되는 ‘움직이는 신’이다.
그렇기에 포사이드의 choreographic object는 신학적 사유에도 깊이 호응한다. 그것은 우리 존재가 고정되지 않은 과정이며, 매 순간 새롭게 구성되어야 하는 서사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의 작업은 춤을 추지 않는 춤, 몸이 아닌 것으로 존재를 흔드는 안무를 통해, 인간이란 존재가 관계 속에서 진동하는 존재라는 신학적 통찰을 예술적으로 구현한다.
존재의 형식, 떨림의 진동
우리는 존재의 진동을 언제나 체험한다. 그 진동이 미세할 때도 있고, 강하게 울릴 때도 있다. 떨림은 때로는 불가피한 실수에서, 때로는 의도하지 않은 충격에서 발생하지만, 그 본질은 언제나 존재의 ‘발생’에 있다. 이 진동은 우리가 고요히 있을 때도, 끊임없이 우리를 불러내며, 우리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고 있든, 결국 우리는 존재를 다시 묻게 된다. 바로 그 질문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영화에서 미자는 <시> 속에서 시를 쓰기 시작하며, 그 과정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간다. 그녀는 외적인 조건과 감각을 통해 자신을 형성하고, 결국 존재의 진동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헤어질 결심>의 해준은 서래와의 관계 속에서 불안정하고, 그녀를 해석하려 할수록 그는 더 깊은 떨림에 빠진다. 그가 따라가는 것은 단순한 사건의 실체가 아니라, 서래라는 존재의 진동이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류타는 아버지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그 의문은 그의 몸과 감각 속에서 살아있는 떨림이 되어, 결코 고정된 정체성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들 모두는 포사이드의 choreographic object처럼,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재구성되고 재진동되는 존재임을 알게 된다.
포사이드의 작업은 우리의 존재가 언제나 움직이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 속에서 존재를 찾아내며, 그 존재의 본질은 고정되지 않은 관계와 상호작용 속에서 살아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가 제시하는 choreographic object는 단순한 물리적 객체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그 본래의 의미를 드러내는 존재론적 장치다. 마치 신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존재와 관계 속에서 계속해서 창조되고 변형되는 존재처럼, 포사이드의 안무 역시 고정된 동작이나 형태를 넘어, 존재의 지속적인 발생을 요구한다. 이는 우리가 신학적 질문을 던질 때와도 마찬가지이다. 신은 우리 존재와 함께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창조되고 살아 있는 존재이다.
이렇게, 영화, 포사이드, 신학적 질문은 각기 다른 맥락에서 존재의 불안정함과 그 존재를 계속해서 ‘발견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탐구한다. 그 모든 과정은 실패와 떨림을 동반하며, 그 속에서 존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발생한다. 미자는 시를 통해 존재의 진동을 확인하고, 해준은 서래라는 존재 앞에서 흔들리며, 류타는 아버지로서의 정체성의 떨림 속에서 존재를 다시 발견한다. 그들이 겪는 모든 떨림은 고백이 아니라 발견이다. 존재는 결코 고정되지 않으며, 그 존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식도 결국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그렇기에 존재의 진동은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언제나 그 진동 속에서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질문이다. 이 진동이 영화 속에서, 포사이드의 안무에서, 그리고 신학적 사유 속에서 계속해서 울려 퍼지며, 우리는 그 울림 속에서 더 이상 고정된 존재가 아닌, 변화하는 과정 속에 놓인 존재로서의 의미를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