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의 다이아몬드: 형상의 빛을 찾아서

Imago Dei: 흐려진 존재 속에서 드러나는 투명한 진리

by Wooin

물컵 안에 다이아몬드가 있다. 깊고 맑은 물 속에서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맑고 고요한 물 속에서만 드러난다. 물속에서 다이아몬드는 투명한 빛을 발하며, 존재하는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잔잔한 물 속에서 그 다이아몬드는 빛을 받으며 고요히 빛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물이 흐려지면 다이아몬드가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검은색 잉크 한 방울이 떨어지면, 물은 즉시 흐려지고, 다이아몬드는 바로 그 모습을 감춘다. 그러나 그 다이아몬드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보임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을 뿐이다. 물이 맑아지면, 그 다이아몬드는 다시 빛을 발한다. 형상이란 존재의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사건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다. 형상은 그 자체로 고정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반사처럼, 오히려 그 순간의 투명함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어떤 것이다.

물의 맑음은 단지 청결함이 아니라, 존재가 비로소 자신을 허락하는 조건이다. 맑은 물은 세계와 나 사이를 매개하는 얇은 막처럼, 형상을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다. 그것은 사건 이전의 침묵이고, 형상이 깃들기 위한 침전의 자리이다.

물이 탁해져서 다이아몬드가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을 상상해보자. 그때의 물은, 마치 자기 주장과 욕망이 가득 찬 상태와 같다. 물이 흐려지면, 다이아몬드는 보이지 않는다. 마치 우리가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드러내려 할 때, 내면의 본래 모습을 잃어버리고, 그 형상은 감춰진다. 그리고 물속에 잉크나 먼지가 섞이면, 그 안에 있던 본래의 깨끗함이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 모습은 인간의 정화와 비움을 통해 다시 나타날 수 있다. 우리는 다이아몬드를 지닌 존재로 태어났지만, 자주 자신을 채우려는 욕망이나 자기 과시로 인해 형상은 가려진다. 자기 안에서 너무 많은 것을 채우려고 하면, 본래의 모습을 마주할 수 없게 된다. 마치 탁한 물속에서 다이아몬드가 보이지 않듯이.

맑음은 단지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도달해야 하는 과정이며, 신의 형상이 일어나는 사건의 전제다. 그 투명함은 일종의 decreatio, 즉 스스로를 거두는 창조의 방식이다. 신은 빛을 창조하는 대신 어둠을 걷어내는 방식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물속의 다이아몬드처럼, 신의 모습은 인간 안에서 계속해서 회복되고 드러나는 과정 속에서만 그 빛을 발한다. 형상은 맑고, 고요하며,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주장하지 않는 상태에서만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 흐림 속에서도 다이아몬드는 존재한다. 그 다이아몬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보이지 않을 뿐이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비우려 노력하면, 탁한 물이 정화되듯, 다시 그 다이아몬드는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이 맑음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것은 신학에서 말하는 신의 형상(imago Dei) 회복과도 연결된다. 신은 인간 안에 형상을 두었지만, 그것은 고정된 형상이 아니다. 형상은 끊임없이 다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한 번 보였다고 해서 영원히 보이는 것이 아니다. 반짝임은 순간적이고, 그 빛이 사라지면 다시 그 빛을 찾는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 반짝임을 다시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형상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일, 다이아몬드가 반짝이는 그 순간을 반복해서 만들어가는 일이다.

이 비유는 바로 신의 형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신의 형상은 단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본질적인 반영, 내면의 깊이에서만 드러나는 모습이다. 그 형상은 인간 안에 이미 존재하지만, 그것이 보이려면 어떤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신의 형상도 인간의 자아와 욕망의 흐림 속에서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본래의 모습은 결코 사라지지 않지만, 흐려진 물 속에서는 그 진정한 모습을 잃은 것처럼 보일 뿐이다. 형상은 고정된 본질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이 드러나는 과정 속에서 존재한다. 물속의 다이아몬드처럼, 형상도 인간의 내면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고 회복되는 것이다.

그 노력은 자기 자신을 비워내고, 탁한 물을 정화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비움의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움'(kenosis, 케노시스)이다. 물은 가득 차면 탁해지고, 다이아몬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물이 비어 있을 때, 다이아몬드는 드러난다. 비움은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하나의 고정된 모습이 아니라, 반복적인 재구성과 정화의 결과로서 비로소 드러날 수 있다. 비움은 결핍이 아니라, 생성의 방식이다. 고요한 수면 아래에서 형상이 생겨나는 그 시간은, 존재가 자신을 보류하는 침묵의 시간이다.

물은 맑아지기 위해 그 속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비워야 한다. 이처럼 신은 자신의 능력과 형상에 대한 고정된 개념을 비워내고, 인간 안에서 그 형상이 완성되도록 하신다. 신은 인간의 자아와 욕망을 비우는 과정 속에서 그 본래의 모습 안으로 스며들어간다. 물이 맑아지면, 다이아몬드는 다시 드러나듯, 인간이 자신의 자아와 욕망을 비우고 고요해질 때, 그 안에서 신의 형상도 새롭게 드러난다. 이 과정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형상을 두시고, 그것을 다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형상은 우리가 자기를 덜어낼 때, 비움 속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이때의 '형상'은 하나의 고정된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변화하고,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을 통해 다이아몬드는 처음처럼, 다시 빛을 발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형상은 끝없이 다시 만들어지고, 그때마다 새로운 방식으로 드러난다. 형상은 응고된 형상이 아니라, 정화의 리듬 속에서 재구성되는 이미지다. 그것은 완성형이 아니라 생성형이다.

또한, 물이 흐려지는 것을 상상해보자. 흙이나 먼지, 혹은 잉크가 떨어지면 물은 빠르게 탁해진다. 그때 물 속의 다이아몬드는 한순간에 사라진다. 그러나 그 물이 정화되면, 다시 다이아몬드는 반짝이기 시작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정화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자신의 형상을 다시 발견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그것을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이 정화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자신을 비워내는 것이다. 물속에서 다이아몬드가 보이려면, 물이 가득 차 있지 않아야 한다. 비움과 정화는 그저 한 번에 끝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반복되며 지속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형상은 단지 한 번 반사되는 것이 아니다. 반짝임은 한순간이고, 탁해지는 건 쉬운 일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람은 자신의 물을 흐린다. 자신의 목소리를 키우고,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려 든다. 그렇게 형상은 다시 가려진다. 그러나 신학은 단지 그 형상을 회복하라고만 말하지 않는다. 더 조용히 말한다: 형상은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여기에 바디우(Alain Badiou)의 존재론이 다시 한번 구조적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모든 존재는 처음에 ‘공집합’으로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는 존재를 공집합으로 본다. 아무것도 갖지 않았기에,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자리. 존재는 실체가 아니라, 사건이 오기를 기다리는 구조다. 다이아몬드는 물이 있어야 빛난다. 물은 존재를 갖고 있지 않지만,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 이때 형상은 본질이 아니라, 사건적인 드러남이다. 스스로를 잠재운 존재만이 누릴 수 있는 투명한 불완전함. 존재는 실체가 없지만, 무로부터 형상이 솟아오르기 위해 자신을 준비하는 공간이다.

존재는 어떤 사건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내며, 그 사건은 외부로부터 오거나, 무(無)의 바닥에서 솟아오른다. 하나님의 형상도 마찬가지다. 인간 안에 고정된 본질로 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조건 속에 비워진 채 잠재된 형상, 사건적으로만 드러나는 형상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질문이다: 이 형상은 단지 주어진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생성되어야 하는 것인가? 다이아몬드는 존재하지만, 물이 흐르지 않으면 결국 고여 썩는다. 그렇다면 신학은 이 형상의 존재를 어떻게 ‘유지’하고 ‘갱신’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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