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의 긴장

파루시아와 에스카톤의 변증법

by Wooin

어둠이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처럼 짙고 무거운 어둠. 그러나 그 어둠은 단순한 부재가 아니었다. 눈을 감으면 더 선명해지는 상, 폐허 속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어둠은 빛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빛은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깨어난다. 어둠은 빛을 감추고, 빛은 어둠을 통해 드러난다. 이 역설은 단순한 모순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드러나고, 다시 감추어지는 생명의 리듬이다.


빛은 어둠을 물리치지 않는다. 그것은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 은밀히 그 자체를 펼친다. 새벽이 오기 전, 어둠은 깊어지고, 그 깊음 속에서 가장 미세한 빛이 반짝인다. 파루시아(Parousia), 임재란 이런 빛이다. 그것은 벼락처럼 눈부시게 도래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둠 속에서 손끝에 닿는 미미한 온기, 긴 밤의 끝에서 어슴푸레 떠오르는 여명.


파루시아는 이미 도래했으나, 아직 완전하지 않다. 빛은 여기에 있으나, 여전히 어둠 속에서만 감지된다. 그 임재는 은폐와 드러남의 교차점에서, 감춰진 빛의 떨림으로 존재한다. 마치 나무 뒤로 숨어있는 태양이 나뭇잎 사이로 흐릿하게 반짝일 때, 우리는 그 빛을 직접 보지 못하지만, 그 그림자 속에서 빛의 존재를 느낀다. 임재는 언제나 부분적이며, 부분적이기에 더 깊다.


그러나 이 빛은 단순히 나뉘어진 파편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꿰뚫는 목적의 빛이다. 에스카톤(Eschaton), 푯대. 어둠 속에서 스며드는 빛의 미세한 떨림은 시간의 끝에서 터져 나올 완성의 빛을 예고한다. 그러나 이 목적은 이미 시작되었으나, 여전히 다가오는 중이다. 이미 도래했으나,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 에스카톤은 시간의 푯대이며, 동시에 시간의 매 순간을 가로지르는 빛이다.


빛은 드러남이고, 어둠은 은폐다. 그러나 드러남은 곧 은폐의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파루시아는 번쩍이는 천둥도, 폭발하는 불길도 아니다. 오히려 성찬의 빵을 떼어 나눌 때 손끝에서 느껴지는 따뜻함, 기도 속에서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얼굴, 서로의 눈빛 속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미소. 빛은 모든 것을 드러내지만, 그것을 결코 다 보여주지 않는다. 빛은 어둠을 통해 스며들며, 어둠은 빛 속에서 자신의 깊이를 숨긴다.


이미와 아직의 긴장은 곧 은폐와 드러남의 변증법이다. 우리는 빛을 기다리며, 그 빛을 더듬는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미래를 향한 무기력한 기대가 아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이미 번지는 빛의 흔적을 감각하는 것, 사라질 듯 떠오르는 빛의 숨결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마라나타(Maranatha), "속히 오소서." 그러나 이것은 단지 먼 미래의 소망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여기 임재한 빛을 부르는 호명이다.


마라나타는 이미와 아직을 잇는 언어다. 그것은 도래할 빛을 부르면서, 지금 여기 어둠 속에서 그 빛을 감지한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며 말한다. 마라나타. 빛은 아직 완전하지 않지만, 이미 여기 있다. 마라나타. 그 빛은 감춰져 있지만, 우리는 그 빛 속에서 서로의 얼굴을 인식한다.


이 빛은 단순히 물리적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존의 방식, 드러남의 양식이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빛은 미세하게 번지고, 그 미세함 속에서 빛은 더욱 깊어진다. 파루시아는 완전한 드러남이 아니라, 은폐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빛의 흔적이다. 마치 깊은 숲 속에서 이슬방울에 반사된 아침 햇살, 물결 위에 아른거리는 달빛처럼, 빛은 항상 어둠 속에서 더 선명하다.


우리는 기다리며 빛을 찾고, 빛을 더듬으며 어둠을 건너간다. 에스카톤은 완성의 푯대지만, 그 완성은 이미 여기 임재한 빛의 떨림 속에서 매 순간 느껴진다. 파루시아는 그 떨림의 이름이고, 마라나타는 그 떨림을 부르는 소리다.


마라나타.
빛은 이미 여기 있고, 여전히 오고 있다.
그것은 감춰진 채 드러나며, 드러남으로써 감춰진다.
우리는 그 빛을 기다리며, 이미 그 빛 속에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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