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급진적 상상력
묵시록을 처음 접했을 때, 독자들이 경험하는 것은 신학이 아니라 당혹이다. 짐승과 불, 하늘의 전쟁, 붉은 용, 칠 재앙, 천년왕국, 그리고 새 예루살렘. 이 일련의 환상들은 이성적인 설명의 문턱을 넘지 못한 채 이미지의 과잉으로 밀려온다. 그때 독자가 느끼는 것은 신성함이 아니라, 낯설고 기이한 서사의 감각이다. 언뜻 보면 이 세계는 신학이라기보다 오히려 SF적 상상력, 즉 현실의 경계를 밀어붙이는 과도한 이미지의 공간에 가깝다.
그러나 바로 그 ‘이상함’—그 낯선 구성과 형식적 불균형—이야말로, 묵시문학이 성서 내에서 수행하는 신학적 역할의 핵심이다. 그것은 기존 현실 인식을 전복시키는 하나의 감각적 전략이며, 도래할 세계를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아닌, 현재 안으로 끌어오는 급진적 상상력의 장치다. 묵시록은 미래를 말하는 책이 아니라, 현재를 붕괴시키는 책이다.
묵시문학의 내러티브는 시간의 직선성을 거부한다. 사건은 연속적으로 전개되지 않으며,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상징은 과잉되고, 인물들은 명확한 인과관계없이 등장하고 사라진다. 이러한 구조는 전통적인 해석의 질서를 방해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묵시의 언어는 독자의 감각과 사고를 흔드는 하나의 충격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단지 '무슨 뜻인지' 알려주는 텍스트가 아니라,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새롭게 사유하게 하는가를 유발하는 감각적 텍스트다.
이 지점에서 묵시문학은 SF와 겹친다. SF는 늘 ‘지금 여기’의 세계를 잠정적으로 해체하며, 낯선 질서의 가능성을 제기하는 장르다. 마찬가지로 묵시문학은 ‘이 세상’의 질서가 최종적이지 않음을 반복적으로 선언한다. 그러나 둘의 결정적인 차이는, SF가 가능성을 실험하는 상상이라면, 묵시는 계시의 언어라는 점에 있다. 묵시는 허구를 통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허구를 통해 진리를 깨뜨리는 방식으로 말한다. 그래서 오히려 SF보다 더 급진적이다.
묵시의 언어는 불안정하다. 그리고 그 불안정성은 문학적 한계가 아니라, 신학적 의도다. 왜냐하면 신은 인간의 언어로 정확히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서는 이 점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드러낸다. 계시는 언어를 통해 다가오되, 항상 완전하게는 말해지지 않는다. 과장된 이미지, 해석 불가능한 환상, 의미의 불투명성은 계시의 진실이 언어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미학적 장치다.
이런 점에서 성서는, 특히 묵시문학은 하나의 아방가르드한 문학 실천이다. 그것은 해석을 요구하면서도, 해석의 바닥을 흔들며, 독자의 독해 능력 자체를 비틀어놓는다. 정리되지 않고, 결론이 없으며, 의미는 흔들리고, 진리는 도달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흔들림 안에서 독자는 새로운 신학적 사유의 자리로 옮겨진다. 믿음이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감각을 견디는 일이기 때문이다.
묵시록은 결국 종말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를 끝내는 상상력이다. 그리고 그 파열의 자리에서, 새로운 감각과 새로운 언어, 새로운 신학이 틔워진다. 그래서 묵시록은 SF처럼 읽히지만, SF를 넘어서는 텍스트다. 그것은 믿음이 언어로 가능하다는 환상을 거부하고, 믿음이 언어의 파열 속에서만 비로소 시작될 수 있음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