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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혁명, 그리고 예언자적 상상력

은유로서의 예수, 시학으로서의 신학

by Wooin


오늘날의 언어는 닫혀 있다. 우리의 의식은 허위의식과 논리의 우상적 체계 속에 구조화되어 있다. 언어는 이제 현실을 재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현실을 반복시키는 메커니즘이다. 바디우의 말처럼, 진리는 체계 내부에서 생산되지 않는다. 진리는 오히려 그 체계의 파열에서, 사건의 틈에서 솟아오른다. 이때 진리는 산문적 질서로는 포착되지 않는다. 진리는 시의 언어, 곧 감각 이전의 감각, 의미 이전의 이미지로 출현한다.


시적 언어는 브루그만이 말하는 예언자적 상상력과 가장 밀접한 지점에서 만난다. 예언자의 핵심은 단순한 도덕적 비판에 있지 않고, 현실의 구조를 흔들기 위한 새로운 상상력에 있다. 그 상상력을 구성하는 언어는 전복적이며, 불화적이고, 체계로부터 배제당한 언어, 바로 시의 언어다.


브루그만이 구약의 예언자들을 ‘서정시인’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예언자들은 정치적 산문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서정의 언어로 말한다. 이미 완결된 현실, 이미 폐쇄된 상징 질서에 불편한 언어를 삽입한다. 그 언어는 자주 울음이 되고, 조롱이 되고, 탄식이 되며, 간혹 침묵으로 다가온다. 예언자들은 목적을 제시하지 않으며, 대안을 구체화하지 않는다. 방향 이전에 전복의 감각을 회복시키는 언어로 말한다.


예언자적 언어는 결핍에서 비롯된다. 브루그만은 모세의 대항문화가 “결핍된 세계”에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결핍은 상상력의 기원이자, 혁명의 공간이다. 풍요는 상상력을 정지시키고, 기억을 약화시키며, 모든 것을 현재라는 감각적 즉시성 안에 고정시킨다. 하지만 결핍은 과거의 기억을 불러들이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게 만든다.


이러한 결핍의 체현은 김수영의 시론에서 더욱 급진적인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는 시를 ‘온몸의 언어’라고 부르며, 시란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로 반응하는 것”임을 주장한다. 이는 단순한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체제의 감각적 틈을 찾아내고 몸의 언어로 응답하는 정치적 행위다. 김수영의 시는 바로 그 점에서 브루그만이 말한 예언자적 시학과 만난다. 시는 그의 말대로 ‘폭발’이며, 그 폭발은 기존 질서의 언어를 파열시키는 몸의 진술이다.


이런 맥락에서 브루그만의 구약신학은 단순한 고대사 해석이 아니라, 언어의 정치학에 대한 깊은 신학적 사유다. 그는 희망이란 개념조차도 오늘날 어떻게 체계에 봉사하도록 변형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십자가 없는 희망, 왕권적 언어에서 파생된 값싼 위로는 현실에 안착하며 사람들을 마비시킨다. 하지만 진정한 희망은 “부를 거부당하고 배부름에서 차단된” 이들에게 주어지는 무겁고 힘든 희망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예수의 운동과 십자가를 하나의 기표적 사건으로, 곧 시적 몸짓으로 다시 읽을 수 있다. 예수의 행보는 단지 도덕적 교훈의 전달이 아니라, 말과 몸이 하나가 된 상징적 저항이었다. 그는 말했고, 동시에 행위했다. 그의 언어는 축복과 저주의 시적 전복이었고, 그의 몸짓은 감각화된 기호였다.


예수운동(혹은 예수의 공생애 3년)은 산문적 현실을 시적으로 깨뜨리는 언어적 개입의 시간이었다. 그는 풍요의 논리에 반대했고, 권력의 상징 질서에 불순종했으며, 말보다 먼저 몸으로 그 불화를 실천했다. 병든 자를 만지고, 배척된 자와 식탁을 나누고, 권위의 언어를 침묵으로 답하는 일련의 행위는 그 자체로 예언자적 환유였다. 십자가는 그 절정이다.


십자가는 단지 고난의 표상이 아니다. 그것은 체계가 끝내 처리하지 못한 침묵의 기표이자, 모든 산문적 권력이 혐오하는 시적 형식이다.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오히려 말할 수 없음을 말하는 궁극의 은유다. 그 침묵 속에서, 다시 말하기가 시작된다. 다시 말하기는 새로운 언어의 시작이며, 예언자의 상상력의 복원이다.


셸리 맥페이그는 신학이 더 이상 객관적 명제의 언어가 아니라 은유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신은 ‘군주’나 ‘통치자’가 아니라, ‘숨결’과 같은 은유로 접근되어야 한다. 이러한 은유신학은 신의 본질을 산문으로 고정하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시적 언어 속에 보존하려는 시도다. 십자가의 침묵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은유적 공간이며, 그곳에서 우리는 다시 신을 시처럼 상상해야 한다.


이와 유사하게 캐서린 켈러는 신학을 정태적 교리의 체계가 아니라 '신시학(theopoetics)'으로 재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그녀에게 신은 궁극적 답이 아니라 끝없이 열리는 질문이며, 세계는 완결된 진리가 아니라 미완의 시적 사건이다. 켈러의 신시학은 ‘말해지지 않은 가능성들’을 향해 열린 신학이며, 신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다. 이 관점에서 예수의 십자가는 ‘완결’이 아니라 ‘열림’이며, 언어로 붙들 수 없는 생명의 은유적 징후다.


결국 예수는 시인이었다. 그의 언어는 산문적 체계를 뚫는 신학적 시였다. 그의 희망은 날카로웠고, 그의 진리는 부드럽지 않았다. 그의 언어는 포만한 자들을 향해 칼처럼 날아갔고, 그의 몸은 결핍된 자들과 함께 부서졌다.


이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시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한 문학적 장르인가,

아니면 체계를 전복하는 존재의 언어인가.


예언자란 누구인가.

그는 단지 비판하는 자인가,

아니면 상상력을 복원하는 신학적 행위자인가.


그리고 희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위로인가, 아니면

현실의 고통에 끝까지 직면하겠다는 결연한 결핍의 윤리인가.


오늘, 지배적인 현실은 여전히 산문적이다.

모든 것은 완결되었고, 말은 체계 속에 봉합되었으며, 상상력은 광고 이미지에 환원되었다.

이 현실 속에서 시는 마지막 남은 혁명이며,

예언자의 언어는 마지막 남은 신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시로 말하고,

예언자적으로 상상하며,

신학적으로 저항해야 한다.


이것이,

희망 없는 시대에

희망을 다시 말하기 위한

유일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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