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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 너머의 감각

예배, 예전, 성사의 낮은 자리에서

by Wooin




의식은 끝났고, 사람들은 흩어졌다. 예배당 안에는 아직도 희미한 향내가 남아 있다. 누군가는 그 향기를 ‘은혜’라 말하겠지만, 나는 그것을 ‘기억’이라 부르고 싶다. 그날의 빛과 소리, 침묵과 몸짓, 눈과 입이 만들었던 느린 구조들. 그것들이 말 없이 남긴 무언가. 예배는 아마도, 그렇게 사라지면서 머무는 형식일 것이다.



예배라는 말의 어원을 더듬어보자. 히브리어로 שָׁחָה (shachah), ‘몸을 굽히다, 엎드리다’. 한없이 낮아지는 몸, 신 앞에서 비워지는 자아. 헬라어로는 προσκυνέω (proskyneō), ‘입을 맞추다, 경배하다’. 왕 앞에서의 몸짓, 초월자에 대한 절대적 인정. 예배는 처음부터 몸의 언어였다. 말을 잃은 존재가 몸으로 고백하는 서사. 그것은 단지 형식이 아니라, 존재의 한 구조였다.



하지만 이 구조는 오랫동안 일방적인 위계를 품어왔다. 신은 위에 있고, 인간은 아래에 있었다. 높임은 찬양이 되었고, 낮춤은 경배가 되었다. 예배는 경외의 형식을 빌어 복종의 감각을 내면화하는 장치가 되기도 했다. 초월의 공간에서, 절대의 언어로, 인간은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신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신은 그러한 방향성을 요구한 적이 없다.



예전 또한 비슷한 언어 구조 속에 머물러 있었다. 예전이란 성스러운 시간과 공간을 반복 가능한 형식으로 조직한 의례적 구조다. 라틴어 liturgia는 ‘공적인 봉사’ 혹은 ‘공동의 행위’를 뜻한다. 그것은 단지 교회의 의례가 아니라, 삶 속에 깃든 반복 가능성과 형식성의 예술이었다. 문제는 이 형식이 형식 자체로 완결되는 순간, 감각을 지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전은 감각의 재구성이 아니라, 신성의 매뉴얼처럼 읽히기 시작했고, 그렇게 많은 몸들이 예전의 리듬 속에서 자신을 잃었다.



성사 역시 마찬가지다. 성사는 성스러운 것이 ‘표현되고, 전달되고, 드러나는 지점’이다. 이는 단지 성찬이나 세례 같은 특정 행위만을 뜻하지 않는다. 성사는 세계 속에서 신비가 감각되는 순간들, 의미가 밀도를 가지는 자리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성사는 오랫동안 통제되고, 구분되고, 누군가에 의해 규정되어 왔다. 성사는 삶과 분리된 ‘신성의 지정좌석’처럼 기능해왔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묻는다.

예배는 왜 특정한 건물에서만 가능해야 하는가.

예전은 왜 예배당에서만 반복되어야 하는가.

성사는 왜 어떤 손에 의해서만 집행되어야 하는가.



이제 예배는 다른 감각의 문을 열어야 한다.

더 이상 ‘올림’의 형식이 아니라, ‘응답’의 감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예배는 위로 향한 경배가 아니라, 삶을 향한 동행의 리듬이 되어야 한다.



이 감각의 전환은 신 개념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

신은 더 이상 외부에서 완전하게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다.

신은 우리 삶의 가능성 속에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속에서, 함께 생성되고, 함께 흔들리는 관계적 실재이다.

신은 강요하지 않고, 설득하며, 압도하지 않고, 기다린다.

예배는 그 조용한 부름에 응답하는 존재의 움직임이다.



예전은 더 이상 정해진 텍스트를 낭송하는 의례가 아니다.

삶이라는 무대에서 몸과 감각이 다시 의미를 짓는 반복의 실험이다.

예전은 단지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느끼는 것’이다.

이 기억의 장치들은 반복을 통해 우리 감각의 결을 되살리고, 우리 존재가 다시 세계와 관계 맺게 하는 매개가 된다.


성사 역시 더 이상 경계된 장소에서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관계 맺는 순간마다 발생하는 신비의 응결이다.

빵과 포도주가 아니라, 숨과 손, 말과 침묵, 돌과 식물 속에서 감지되는 세계의 깊이가 곧 성사다.

성사는 어떤 형식이 아니라, 감각과 의미의 깊이가 일치하는 순간이다.


예배는 결국 ‘올바르게 무릎 꿇는 방식’이 아니다.

예배는 존재의 자세를 다시 조율하는 일이다.

어떤 것을 올리기보다, 어떤 것으로 함께 서는 방식이다.

삶을 다시 바라보는 감각, 고통을 무시하지 않고 바라보는 응시,

관계를 단절하지 않겠다는 결단,

그 모두가 예배다.


예전은 더 이상 형식이 아니다.

예전은 세계에 대한 감응의 리듬이다.

성사는 더 이상 종교적 기호가 아니다.

성사는 세계의 구조 속에서 느려지는 순간,

그 느림이 한 존재의 안쪽을 건드릴 때 발생하는 변화의 흔적이다.


신성은 고정되지 않는다.

관계 안에서 미묘하게 흔들리며,

우리가 응답하는 만큼만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예배는 계속 열려야 한다.

종결이 아닌 여백이며, 형식이 아닌 감각의 문장이다.

예전은 기억의 훈련이자, 창조의 반복이다.

성사는 우리가 서로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하는

존재의 언어적 실험이다.



결국에 우리의 욕망을 드러내는 기표 덩어리를

어떻게 재배열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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