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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본다는 것의 의미.

신앙, 세계관 형성과 해석학적 전제의 다른 이름.

by Wooin

인간은 세계와 자기 존재를 해석하며 살아간다. 이 해석은 단지 지식이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적 수준에서 작동하는 근본 구조, 곧 해석학적 전제를 전제한다. 누구도 이러한 전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인간은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든 의미의 질서를 구성하며 자신을 그 질서 안에 위치시킨다. 이러한 전제가 바로 세계관의 토대를 이룬다. 세계관은 선택 가능한 이념이나 사유 방식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에 반응하고 자기 실존을 구성하는 방식의 존재론적 조건이다.



이러한 구조는 지식 이전의 신뢰에 기반한다. 인간은 삶의 모호함과 불확실성 속에서도 어떤 실재에 의지하여 질서를 모색한다. 따라서 해석학적 전제는 단순한 인식 결과가 아니라, 근원적인 신뢰의 표현이며, 실존이 자신을 초월적 가능성에 개방하는 방식이다. 이는 고정된 사실에 대한 동의가 아니라, 의미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실존적 열림이며, 세계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이기도 하다.



해석학적 전제는 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 속에서 반복적으로 구성되고 갱신되며, 실존의 결단과 실천을 통해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세계관은 과거의 기억에 뿌리를 두되, 언제나 미래를 향한 지향을 품고 있으며, 현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존재를 배치하려는 실천적 전략이다. 이러한 점에서 해석학적 전제는 단지 사고의 틀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며, 인간이 스스로를 존재시켜 나가는 시간적 실존의 구조다.


그러나 이 구조는 외부로부터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그 가능성을 수여받는 동시에, 그것을 선택하고 감당해야 할 책임을 지닌다. 해석학적 전제는 주어짐과 과제성을 동시에 내포하며, 인간은 이 전제 위에 서서 삶의 응답을 구성해 나가야 한다. 다시 말해, 세계관 형성은 수동적 수용이 아니라 능동적 형성과정이며, 주체는 자신이 신뢰하는 토대를 끊임없이 성찰하며 새롭게 구성해 가야 한다.



이러한 해석학적 전제는 단순한 감정적 신념이 아니다. 성숙한 해석학적 태도는 감정의 밀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그것이 어떤 실재를 향해 있는지를 스스로 사유하고 말할 수 있는 자기 반성적 구조를 요구한다.



특히 종교적 신앙의 경우, 이러한 해석학적 전제는 더욱 자기 성찰적 과정을 필요로 한다. 신앙은 단지 종교적 체험이나 관습의 수용이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고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총체적인 지평이다. 이 지평은 정서나 전통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지성과 실존이 함께 참여하는 해석과 실천을 통해 지속된다. 신학은 바로 이 자기 이해의 과정을 학문적으로 수행하는 길이다. 그것은 신앙의 내용을 해체하거나 대체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의미를 재조명하고, 실존적 실천과 지적 성찰을 통합하는 방식으로 신앙을 성숙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결국 해석학적 전제는 깨달음과 실천이 결합된 성찰의 구조로 유지되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을 신뢰하고 왜 그렇게 해석하는지를 반복해서 묻지 않으면, 세계관은 관습으로 굳어지고 실천은 공허해진다. 따라서 진정한 신앙이란 자기 초월에 대한 감정적 몰입이 아니라, 지성에 의한 숙고와 실존에 의한 헌신이 만나는 통합의 길이며, 신학은 그 길을 추적하고 비판하며 동시에 길러내는 반성적 사유의 공간이다. 이는 해석학적 전제가 지속적으로 자기를 넘어서도록 돕는 지혜의 실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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