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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실현 욕구가 거세된 직장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by Woo Play

All jobs suck. That's why you get paid to do them.

“모든 직업은 형편없지. 그래서 돈을 받고 그 일을 하는 거야.”

미국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의 명대사 중 하나다. 세계적 밈으로 통용되는 걸 보면 직장인의 고충이란 어디나 비슷한 게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스트레스와 부조리와 부당함을 참으면서, 하루에 몇 번씩 “이게 맞나?”라는 의문을 품으면서도, 그저 먹고살기 위해 뇌 빼고 영혼 없이 직장을 다니는 게 나뿐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 하는 일에서 아무런 보람도 희망도 느끼지 못하는 건 역시 비참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나 싶은 자괴감이 들게 한다. 급여라도 넉넉히 받는다면 보람 따위 느끼지 못해도 상관없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연봉이 많이 오를 거라는 기대도 없다. 유일한 희망인 승진도 어느 시점에서 포기하게 되었다.


맡은 일에는 최선을 다해왔다고 생각하지만, 승진을 위해서는 ‘플러스 알파’가 필요하다. 자리는 한정적이고 경쟁자는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라고 승진 욕심이 왜 없겠는가. 늦은 나이에 입사했으니 승진은 더욱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수년간 회사에서 글로는 공개하지 못하는 여러 사건들을 겪은 끝에 내린 결론은, 나는 거기에 수반되는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공공기관의 장점은 내가 잘리지 않는다는 것이고, 단점은 저 인간도 안 잘린다는 것이다.”는 말의 공포를 제대로 체험했다. 나는 링에서 내려오기로 했다.


스트레스를 내려놓는 길을 선택하니, 몸은 조금 편해졌지만 마음에는 공허함이 몰려왔다. 형편없는 일을 하면서 그저 그런 급여를 받고 있을 뿐인 자신이 몹시 초라해 보였다.


알고 있다. 직장은 돈을 벌기 위해 다니는 곳일 뿐이다. 자아실현이나 자기계발을 찾는 건 사치다. 내 나이와 경력으로 어디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잘리지 않는 것에 감사하며 “누칼협 꼬이직” 소리에 아무리 속이 긁혀도 참고 다닐 수밖에 없다. 내 남은 인생은 승진도 이직도 포기한 채로 또래 평균보다 못한 월급을 받으며 정년까지 버티는 것이 전부인 인생이다. 그 사실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동굴을 찾아 들어가다

유서를 쓰고 회사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악몽을 꾸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한동안 뜸했던 게임과 만화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뭐가 됐든 퇴근 후에 회사 생각이 나지 않게 해 줄 것이 필요했다.


때마침 약간 넓은 집으로 이사 오면서, 방 하나를 나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을 허락받았다. 닌텐도와 플레이스테이션과 만화책이 갖춰진 방을 보면서 지인들은 몹시 부럽다는 반응과 동시에 “철없는 녀석. 와이프가 고생이 많겠구나.”라는 반응을 보였다. 200% 동의한다. 하지만 내겐 그 동굴이 꼭 필요했다.


동굴 속에서 이세계(異世界)에 빠져 살면 현실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우선, 퇴근 후에 매일 놀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회사에서 모든 에너지를 고갈당하고 온 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에너지가 남아 있다면 맞벌이로서 집안 일과 아이들 케어가 먼저고, 그다음에는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운동을 해야 한다.


취미 생활은 그러고도 시간과 에너지가 남았을 때 할 수 있다. 하지만 체력과 집중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하는 게임은 즐거움보다는 짜증으로 경험된다. 스트레스가 많은 날에는 아무리 재밌는 만화에도 집중하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평생 좋아할 거라고 믿었던 만화와 게임에도 시큰둥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너무 좋아해서 수백 번 다시 듣던 노래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 식상하게 느껴지는 감각과 비슷했다. 나는 그것이 또 슬펐다.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동굴 속 이세계를 찾았지만, 실은 그곳도 현실의 일부였다. 현실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자아실현 욕구가 거세된 직장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직장에서는 일체의 성취욕이 없어졌고, 좋아하던 평생의 취미도 위기를 맞았다. 그냥 영혼 없이 칼퇴하는 직장인으로 살면서 취미생활에나 집중하려 했는데, 이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자아실현 욕구가 거세된 채로 죽지 못해 살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게 되었다. 하고 싶은 일도 없다. 되고 싶은 것도 없다. 사랑하는 짝꿍과 아이들이 있지만, 그들은 내 삶을 지탱해주는 존재는 될 수 있어도 내 삶의 목표 자체가 되어 줄 수는 없다. 언젠가 아이들은 품을 떠날 것이고, 짝꿍에게도 짝꿍의 인생이 있다. 나는 스스로 삶의 목표를 다시 찾아야 했다.


‘어쩌면 무언가를 시작해 보기 좋은 때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가진 부동산도 없고 고소득자도 아니지만, 당분간 우리 가족 먹고사는 데는 문제가 없다. 속은 좀 쓰리지만, 승진을 포기하면서 직장은 좀 더 편한 마음으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스트레스에 잠이 깨거나 하는 일도 많이 줄었다. 아이들도 이제는 중학생이 되어 손이 많이 가지는 않는다.


석사에서 그만뒀던 공부를 다시 시작할 생각은 없지만, 글쓰기에는 도전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번역서는 몇 권 내봤으니, 이제는 내 글을 한 번 써봐도 좋을 때인 것 같았다.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

주제는 아직 못 정했지만, 롤 모델은 예전에 찾아 두었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의 작가 김민섭과 <아무튼, 후드티>의 작가 조경숙이다.


김민섭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를 잊지 못한다. 나도 그처럼 대학원생이었고 시간강사였다. 그도 대학원을 나오는 시점에 나처럼 아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보다 훨씬 치열하게 삶과 부딪쳐 왔었고, 그 모든 것을 지금까지 글로 남기며 많은 이에게 좋은 영향력을 나눠주고 있다. 그런 그를 보며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도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먹고사는 일이 만만하지 않다는 핑계로 생각만 하고 실천으로 옮기진 않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만 미뤄도 될 것 같다.


조경숙 작가의 <아무튼, 후드티>는 내가 회사 일로 힘들어할 때 큰 위로를 주었던 글이고, 지금도 가끔 펼쳐보며 위안을 얻고 마음을 다잡는 데 쓰고 있다. 하지만 이 분을 롤모델로 삼은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고, 콘텐츠 평론의 고수이기 때문이다. <시사IN>에서 연재 중인 [콘텐츠의 순간들] 코너를 읽어보면 조경숙 특유의 날카로우면서도 따듯한 시선을 잘 느낄 수 있다.


김민섭도 좋아하는 만화에 대한 글을 모아 <고백, 손짓, 연결 - 가혹한 세상 속 만화가 건네는 위로>라는 제목의 책을 낸 적이 있다. 내가 만화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건 이 두 사람의 영향이 크다. 최근 조경숙의 신작 <닌텐도 다이어리>도 내겐 좋은 의미로 충격적이었다. 게임에 대해 이렇게 당당하고 즐겁게, 엄마와 딸이 함께 이야기하는 책을 나는 여태껏 본 적이 없었다.


나도 그들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신선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글을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첫 번역서 <유년기 인류학>을 내면서, 언젠가는 어린이 인류학에 대한 번역서가 아닌 나의 글을 써보겠다고 약속했었다. 이제는 공부도 확실하게 그만뒀고, 육아에 대한 관심도 예전만은 못해서 그 약속은 지키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번역서가 아닌 내 글을 써보겠다는 약속은 지켜보고 싶어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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