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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불륜이라는 판타지에 대하여 <시든 꽃에 눈물을>

한없이 소중했던 사람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너와 나를 위하여

by Woo Play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
한없이 소중했던 사람이 있었음을
잊지 말고 기억해줘요


1988년 발표된 <세월이 가면>의 노랫말이다. 이 노래는 지금까지 여러 가수들에 의해 꾸준히 리메이크되면서 사랑받고 있다. 아마도, 지나간 사랑을 추억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성을 담았기 때문이리라. 그 사랑이 진심이었다면 더더욱.


제 아무리 뜨겁게 불타오르는 사랑을 했어도, 언제까지나 뜨겁기만 할 수는 없다. 애정의 온도계는 함께하는 시간에 비례해 낮아지기 쉽고, 그러다가 어떤 임계점 아래로 내려가게 되면 관계는 위태로워진다. 그러나 비록 예전처럼 뜨거워질 수는 없어도 저 노랫말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한없이 소중했던 사람'이었음을 잊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배신하는 행위, 이를테면 지금 이야기할 주제인 불륜 같은 건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불륜은 넓은 의미에서는 인륜을 저버리는 모든 행위를 뜻하지만, 보통은 혼인 관계에서 어느 한쪽이 외도를 한 경우를 말한다. 인간적으로는 상대에 대한 배신이고, 사회적으로는 지탄의 대상이며, 법적으로는 혼인관계를 파탄에 이르게 한 책임을 져야 하는 유책행위이다.


하지만, 창작물에서 불륜은 아주 오래된 단골 소재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인류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아마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도 그럴 것이고, 어쩌면 멸망한 이후에도 다른 지적생명체가 본다면 가장 재밌어할 이야기다.



오늘 이야기할 네이버 웹툰 <시든 꽃에 눈물을>도 불륜을 소재로 한 19금 로맨스 웹툰이다. 처음엔 가볍게 야한 웹툰이나 보자는 마음으로 클릭했다. 하지만 그냥 야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웹툰이 아니라 시를 읽는 것 같은 가슴 시리고 눈가 촉촉해지는 연출 때문인지, 양성평등적으로 눈호강시켜 주는 비주얼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말도 안 되는 캐릭터고 비현실적인 스토리라고 생각하면서도 몰입해서 보았다. 여주인공 ‘나해수’가 이제는 좀 행복해지기를, 그리고 그의 남편 ‘강민철’은 제발 철 좀 들기를 바라면서.


(※ 작품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으나, 안 보신 분들의 작품 감상에 크게 방해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웹툰 <시든 꽃에 눈물을>은 성인 전용 콘텐츠입니다.)


나해수와 강민철은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 불우하게 자라 의지할 곳이라곤 서로밖에 없었던 그들은, 뜨겁고 반짝이는 사랑을 했다. 그래서였을 거다. 해수가 자신의 이름으로 거액의 빚을 진 민철을 담담하게 용서하고, 당연하다는 듯 그 빚을 갚고 있었던 것은.


빚 때문에 서류상으로는 이혼했지만 여전히 민철과 동거하고 있는 해수는 언젠가 그 빚을 다 갚고 민철과 재혼할 날을 바라보면서 쉬지 않고 일을 한다. 해수에겐 아직 민철이 ‘한없이 소중했던 사람’이었기에. 하지만 민철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그런 해수의 헌신을 알면서도 바람을 피웠으니까. 오랜 백수생활 끝에 취직한 회사에서, 한참 어린 여자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숨기고서.


남편의 빚을 갚느라 반짝이는 젊은 날을 다 써버리고, 이제는 시들어갈 뿐이었던 해수에게 그런 민철의 행동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된다. 하지만 그 무렵, 해수에게도 마음을 흔드는 새로운 남자가 있었다. 그것도 외모 최상위의 재벌2세 연하남이. 바로 이 웹툰의 남주인공 ‘범태하’다. 범태하는 이 웹툰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캐릭터인 동시에, 독자들이 이 작품에 열광하는 가장 큰 이유다.


외모 스펙 상위 0.001%의 20대 초반 재벌 2세가 자신보다 열 살 위의 유부녀에게 일편단심 순정을 바치고 싶어 안달을 낸다? 이건 로맨스가 아니라 판타지로 분류해야 한다. 꼭 엘프나 마법사가 등장해야 판타지인가? 아니다. 현실에서 불가능하거나 일어나기 힘든 일을 대신 상상하고 간접체험시켜 주는 것이 판타지의 핵심 기능이다. 이 작품은, 자신도 나해수처럼 ‘시든 꽃’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에게 거부하기 힘든 판타지를 제공한다. 그것도 매우 화끈한 19금 버전으로.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운명’이니 ‘외로움의 탈출구’니 하는 말로 포장하기를 좋아한다. 불륜이 나쁘다는 건 알지만, 자신에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말로 포장해도, 불륜은 로맨스가 될 수 없다. 범죄는 아니지만 그에 따르는 법적 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꿈만 꾸고 실행은 하지 않거나, 자신은 절대 걸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불륜을 저지른다. 당당하게 불륜을 하는 사람도 더러 있는 것 같지만, 내 상식 밖의 인간들은 논외로 하겠다. 중요한 건 현실에선 그만큼 쉽게 시도하기 어렵다는 거다. 그래서 불륜을 꿈꾸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완벽하게 ‘깨끗한 불륜’이라는 판타지를 원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테면, 현부인이 갑자기 사고로 죽어서 내연녀와 행복하고 당당하게 새 출발을 하는, 진부한 스토리 같지만 실제 현실에서도 드물지 않게 포착되는 그런 판타지를 말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충족시켜 주는 판타지도 그런 것일까?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주인공 나해수와 범태하의 사랑은 비현실적이긴 해도, 엄밀히 말하면 불륜도 아니고 잘못된 일도 아니다. 해수는 민철과 동거 중이기는 했어도 서류상으로는 이혼한 상태였고, 먼저 바람을 피운 것은 민철이었다. 도덕적으로도, 법적으로도 완벽하게 불륜이라는 상황을 피해 가면서, 33살의 ‘시든 꽃’ 나해수가 10살 연하의 잘생기고 돈도 많은 데다가 내 앞에서만 강아지가 되는 야수 같은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 허락되는 판타지가 완성되는 것이다.


재밌는 것은, 주인공 커플의 사랑과 대비를 이루는 강민철의 불륜 또한 판타지라는 점이다. 물론 이들의 사랑은 도덕적 비난을 피해 갈 수 없으며, 작품 내에서는 주인공 커플의 사랑을 무결하게 만드는 장치이자 독자들의 욕받이로 기능한다. 그러나 민철의 불륜 또한 훌륭한 판타지다.


민철의 입장에서는 반지하 셋방에서 자신을 꾸미지도 않고 애교도 부릴 줄 모르며 매일 피곤에 절어 있는 부인만 보다가, 회사에 갔더니 애교 많고 잘 꾸미고 어리기까지 한 여직원이 자신에게 먼저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상황이다. 게다가 자신은 법적으로 이혼한 상태가 아닌가? 유부남이 아니라고 해도 거짓말은 아닌 거다. 이런 조건이 불륜을 정당화할 수 있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불륜을 꿈꾸는 남자 입장에서는 상당히 이상적인 판타지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판타지가 판타지인 것은 그것이 현실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없거나 희박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유부남 유부녀에겐 범태하 같은 연하의 재벌2세 짐승남이 먼저 고백하는 일도, 윤아리처럼 풋풋하고 섹시한 어린 여직원이 이성적 호감을 드러내는 일도 없다. 있다면, 그건 로맨스 스캠 같은 거겠다. 그러니까 이런 만화에서나 간접체험할 수 있는 거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이 없는 것과, 그런 일을 실제로 하지 않은 것은 조금 다르다. 바람피울 능력이 없는 것과, 바람을 피우지 않는 것이 같은 의미는 아니라는 말이다. <시든 꽃에 눈물을> 독자들이 대부분 나해수와 범태하의 사랑은 응원하지만, 강민철과 윤아리의 사랑은 비난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해수는 비록 “설렘 같은 건 옛적에 말라”버렸다고는 해도, 과거 “타 죽어도 좋다”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뜨거웠던 민철과의 사랑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빚쟁이에게 시달리며 반지하 생활을 하면서도 “당신이 있어 버틸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태하에게 처음부터 선을 그으려 했다. 비록 서류상 이혼은 했어도 민철이 아직 자신의 남편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민철은 달랐다. 그는 해수의 헌신을 알면서도 배신했다. 회사 사람들에겐 자신이 싱글이라고 했고, 그 말을 믿고 그에게 이성적으로 다가오는 아리의 마음을 이용해 자신의 욕정을 채웠다. 가난과 세월이 아무리 부부 사이의 설렘과 뜨거움을 닳아 없어지게 했다고 해도, 법적으로는 부부가 아니게 되었다고 해도, 민철이 해수를 ‘소중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면 절대로 할 수 없었던, 해서는 안 될 언행을 했다. 아리에게도 못할 짓이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고.



그러니까 이 작품이 제공하는 판타지는 ‘깨끗한 불륜’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젊은 날에 반짝이고 타오르는 사랑을 했어도, 이제는 식어버린 애정의 온도계와 고단한 현실과 세월의 흐름 앞에 시들어가고 있는, 그러나 “한없이 소중했던 사람”을 향한 신의를 잃지 않은 채 불륜 같은 건 꿈도 꾸지 않고 살아온 모든 이에게, “당신은 시들어가는 꽃이 아니라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선물 같은 판타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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