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아침이면 예배당에 앉아서 성탄 기념 예배를 드린다. 올해도 그랬고 지난해에도 그랬고, 짧지 않은 인생 크리스마스 아침이면 언제나 늘 그래 왔던 것 같다. 그런데 올해 성탄 기념 예배를 드리며, 그 예배에서 말씀 전하시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유독 더 그런 질문이 맴돌았다. 이날을 기념하며 진정으로 되새겨야 할 의미는 무엇일까?
그런 질문이 떠오른 이유는, 문득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고민스러워졌기 때문이다. 한 갈래는 하나님과 동등한 신이시지만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나셨다는 예수님 그분 자체에 관한 관심, 그리고 다른 한 갈래는 예수님이 굳이 스스로의 격을 떨어뜨려 가며 이 땅에 태어나 이루고자 혹은 전하고자 했을 만한 그 의미에 관한 관심. 조금 더 단순하게 환원하여 이렇게 말해 볼 수 있다면, 매체 그 자체에 관한 관심, 그리고 매체가 전달하는 그 내용에 관한 관심, 그 둘 중 어느 갈래가 더 중요한가, 라고 정리해볼 수 있을까.
부모님이 출석하시는 교회, 그래서 나도 억지로 다른 곳에 다니긴 번거로워 그렇게 발이 묶여 다니고 있는 교회, 이번 성탄 예배에서는 주로 예수님 그분 자체에 더 주목하기를 바라는 듯한 설교 내용이었다. 높고 높은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실 때, 그 존귀함에 걸맞은 자리나 합당한 대우 없이, 낮고 낮은 마구간 말구유를 빌릴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예수님께 내어드릴 방 한 칸이 없었다고 말이다. 조금 더 확장하면 그 당시의 사람들이나 지금의 우리나, 예수님을 모시고 맞이하며 내어드릴 수 있는 방을 준비하고 있느냐고 말이다.
성탄절을 맞아 예수님에 관한 신앙적 마음가짐을 더욱 집중시키기 위해서라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내용이고, 그래서 그 의미가 덜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조금 아쉬움은 생겼었다. 기독교에서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삶의 태도로서, 대단히 중요한 핵심 줄기 중 하나는 예수님께서 정리하신 대로,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걸 텐데, 하나님 또는 예수님을 향한 한 갈래는 다뤄졌다 치고, 그렇다면 나머지 다른 한 갈래는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싶어서다.
나 역시 기독교 신앙을 품고 있으며 그 문화 속에서 자라왔기에,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과 그 일생을 그저 한 매체와 그 매체의 내용으로, 단순화시켜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기독교 신앙 속에서 그 매체의 내용이란 그 매체로밖에 전달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 매체로서의 예수님이 스스로를, 유일한 길이요 진리라고 지칭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예수님의 오심으로서밖에 이뤄낼 수 없는 삶이고 성취고 승리다. 하지만 어쩌면 그러하기에 그 예수님의 일생이 뜻하고 전하는 내용 또한, 그렇게 유일하고 위대하며 높은 존재가, 그렇게밖에는 전할 수 없어서, 그렇게 해서라도 전달하고 싶었던, 아주 특별하고도 중요한 내용일 것이다. 희생과 사랑, 특히 나 스스로를 향하는 게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한 희생과 사랑, 그러한 삶을 준비하고 살아감을 말이다.
사실 앞서 언급한 대로, 예수님 자체에 관한 관심과 예수님의 일생이 전하고자 하는 그 의미에 관한 관심을, 엄격히 분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한 갈래를 더 주목하여 볼 수는 있고, 더 중요하게 보이도록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어쩌면 다른 한 갈래에 대하여 외면하거나 보이지 않게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사소하다면 사소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의식이지만, 예수님의 생일을 기념한다며 굳이 삼단 케이크를 거창하게 커팅하는 장면은 보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