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리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2005년 4월 나는 세번째 직장 시트릭스에 입사한지 6개월 만에 지사장 권한대행을 하게 되었다.
두 곳의 스타트업을 거친 후 입사하게 된 시트릭스 한국지사는 열명이 채 안되는 작은 조직이었지만 다국적 기업이었기에 기업 문화나 업무스타일 등 내게는 낯선 것들 투성이였다. 부지런히 적응해 가던 중에, 모시던 지사장께서 갑작스레 회사를 그만두게 되어 본의 아니게 덜커덕 내게 지사장 권한대행의 역할이 맡겨졌다.
내가 지사장 권한대행을 하는 동안 회사에서는 서치펌을 통해 새로운 지사장을 찾고 있었는데 그 일이 그다지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아 보였다. 여러명의 지사장 후보가 인터뷰를 가졌으나 아시아태평양본부(APAC Headquarter)의 사장은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고 서치 펌도 피로감이 누적되고 있던 상태였다. 서치 펌에서는 한국에서의 비즈니스 상황을 좀 더 상세히 듣고 적합한 후보를 찾아봐야겠다며 나에게 미팅을 요청해 왔다.
나는 뜻하지도 않게 소위 글로벌 서치펌(특히나 CEO급 인력 해드헌팅을 전문으로 하는) 헤드헌터와 마주앉게 되었다. 국내 회사 두 곳에서 14년을 근무하다 지인을 통해 처음으로 다국적 회사로 이직했던 나에게 서치펌은 생소하고 낯설기만 했다.
처음 만난 헤드헌터에게 제품의 성격과 한국의 비즈니스 상황, 타겟팅하고 있는 산업군, 주요 고객, 마케팅 방법 등을 설명했다. 흥미있게 듣던 외국인 헤드헌터는 나에게 적합한 사람을 소개해주면 어떻겠냐고 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던 내 마음 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람이 한국 지사를 가장 잘 이끌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바로 ‘나’였다. 한참을 곰곰히 생각하던 끝에 침묵을 깨고 마침내 나는 그에게 내가 적임자인 것 같다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왜 본인이 하고 싶다고 APAC 사장께 손을 들지 않았냐고?’.
왜 손을 들지 못했을까? 아니, 나는 왜 손 들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을까? 이를 생각해보니,두 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먼저, 회사가 나에 대해 갖는 신뢰감이 우려됐다. 다국적 회사 경험이 고작 6개월인 나에게 회사는 과연 한국 지사의 비즈니스를 맡길 수 있을까? 다른 하나는 ‘과연 내가 지사장의 책임이 주는 무게감을 견디며 행복할 수 있을까’하는 도전에 대한 개인적인 용기와 결단이었다.
이 문제를 놓고 헤드헌터와 논의를 한 결과 도출된 솔루션은 ‘내가 하고 있던 권한대행의 연장’이었다. 회사가 나의 권한대행 직을 연장하되, 나의 역량에 대한 평가를 새로운 지사장 평가의 관점에서 시행한다는 것으로, 이를 테면 서로에게 평가(probation) 기간을 주자는 안이었다. 그게 과연 받아들여질까 했더니 그의 코멘트는 명쾌하고 쿨했다. ‘Why not, nothing to lose’ ‘잃을 게 없지 않냐?’라고.
그날 저녁 나는 APAC 사장에게 떨리는 마음으로 그러나 당당하게 모수자천의 레터를 썼다.
그 때가 6월이었으니 12월까지 권한대행 기간을 연장해 주면 당해년도 지사의 실적목표와 몇 가지 과제를 해결하겠노라고. 결과를 보고 내가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 때 가서 지사장을 다시 찾고 새로운 지사장이 부임하면 원래의 내 자리로 돌아가 내 역할을 다하겠다고 했다.
채 이틀이 지나지 않아 회사로부터 내 제안을 수용하겠다는 회신이 왔다.
직원들을 다독이고 격려하며 그 해 하반기 나는 회사에 약속한 결과물을 낼 수 있었다. 매출을 책임지는 것이 대단한 긴장감을 요구하는 일이지만 나는 보람과 기쁨을 느끼며 그 일을 충분히 소화해냈다. 12월 30일 연마감을 한 다음 나는 다시 APAC 사장께 메일을 썼다. ‘이제 회사가 제대로된 월급을 주며 일을 시킬 때가 된 것 같다’고. 다음해 1월말 나는 시트릭스시스템즈코리아의 지사장이 되었고 그 후 5년간 한국 비즈니스를 이끌었다.
계획에 없던 헤드헌터와의 만남에서 사람을 추천해달라는 뜻밖의 질문을 받았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스스로를 추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할 수 있었다. 그의 말처럼, 스스로가 적격자라고 생각한다면, “why not, nothing to lose”아닌가. 얼마전 내가 맡고 있는 부서의 팀장 한 명이 경쟁사로 이직을 하여 공석이 되었다. 팀장 경험이 많은 내외부의 지원자들이 있었지만 나는 지금까지 팀원으로서 자기 일을 잘 수행해온 직원 중 스스로를 ‘추천’한 사람을 최종 선택했다.
세상이 어렵다고 한다. 그 때는 좋았고, 지금은 나쁘다고들 말한다. 절반 정도는 동의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 때나 지금이나 스스로 기회를 만드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라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과 설레임이 있다. 그러나 도전하지 않고서 새로운 문을 열수는 없고 새 지평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부리와 발톱을 뽑아내는 고통이 따를 지라도 그 자리에서 퇴락하기 보다는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물며 잃을 것이 없다면이야… 누구나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시작하지 않는다면 아예 할 기회조차 얻지못할 것이다.
‘어떻게 승진을 요구할 것인가(How to ask promotion)?라고 구글 검색을 해 보면 어마어마한 양의 내용이 나온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나온 논문들도 많다. 그리고 후배들을 대상으로 멘토링을 하다보면 가장 어려워하는 주제 중의 하나이다. 어떤 자리가 났을 때 능력이 많이 못미치는 다수의 사람들이 ‘나는 준비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반면에, 오히려 90% 이상 준비된 사람들이 본인들의 부족한 10%에 주목하여 손을 들지 못한다. 시트릭스에서의 경험을 통해 나는 나의 부족한 10%를 냉정하게 인정하고 손을 들 수 있는 용기가 100%의 능력을 가지는 것 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