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예능 '나가라! 전파소년'에 서린 집단적 광기에 관하여
한 청년이 나체로 단칸방에 서 있다. 방석으로 중요 부위만 가린 채로. 그는 자신을 끌고 온 PD에게 묻는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PD의 반응은 단호하다. “경품으로만 살아남는 거야. 당첨 금액이 일정량을 채울 때까지는 이곳을 나올 수 없어.” 그렇게 말하고 나간다. 방안에 남은 건 경품 응모용 잡지 수 백 개와 필기구. 그리고 카메라 한 대뿐이다. 그렇게 시작한 나체 경품 생활기. 1990년대 말 일본 니혼TV의 리얼리티 예능 ‘나가라! 전파소년((進め!電波少年))’의 코너, ‘경품 응모만으로 생활하기’다.
나체의 청년은 나스비(하마츠 도모아키). 긴 얼굴이 가지(나스비)와 닮다 해서 생긴 별명이다. 경찰 아버지를 따라 이사를 자주 다닌 탓에 사교에 어려움을 겪은 그는, 누군가에게 재미를 줄 때 호감을 얻는다는 것을 깨닫고 코미디언을 꿈꾼다. 성인이 된 나스비는 당시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예능 ‘나가라! 전파 소년’에 출연할 기회를 얻는다. 무작위로 출연자를 선정하는 제비뽑기에 당첨된 것이다. 어떤 기획인지도 모르고 안대로 눈을 가린 채 방으로 들어간다. 그로부터 약 11개월을 방 안에서만 보낸다. 고립감에 조울증을 증세를 보이고, 경품으로 받은 개 사료를 주어먹는 행동 모두가 일본 전역에 방영됐다.
그렇게 나스비는 일본 전역에서 가장 유명해졌다. 문제는 본인은 그 유명세를 모른다는 것. 방송 후에도 그는 자신이 겪는 모든 유명세를 의심한다. 그는 "마치 모든 것이 PD의 장난 같았다"고 회상한다. 외려 극심한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을 겪는다.
그에 비해 청중의 반응은 광기에 가깝다. 야윈 몸으로 춤을 추거나, 눈을 뒤집어 까는 나스비를 보고서 청중은 낄낄거린다. 한밤중 PD가 방 안에 들이닥쳐 얼굴에 플래시를 비출 때에도 마찬가지. 잠에서 덜 깨 어안이 벙벙한 나스비의 표정을 본 사람들은 웃다 쓰러진다. 이 집단적인 광기는 마지막 회에서 정점을 찍는다. 나체의 나스비 주위 모든 벽이 뒤로 젖혀지고, 수백 명의 관중이 그를 향해 함성과 박수를 보낸다. MC들은 달려가 그에게 마이크를 가져대고, 카메라 수 십대가 그를 찍는다. 개인을 조롱하여 웃음을 자아내는 집단 문화의 악마적인 면모를, 일본은 20세기 말 미디어를 통해 구현했다.
웃음과 비웃음은 한 끗 차이다. 웃음은 기쁨, 환희 등 긍정적 감정의 표현이다. 반면 비웃음은 타인을 능멸하고 조롱하여 깎아내리는 것에서 느끼는 희열의 표현이다. 나스비를 향한 일본 청중의 반응은 엄밀히 말해 웃음이 아닌 비웃음인 것이다. 인간은 자신과 친한 사람의 일 앞에서는 하염없이 윤리적이다. 하지만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망가지거나 조롱을 당할 때는 쉽게 윤리의 가면을 벗어던진다. 방송을 통해 나스비가 유명세를 치르는 동안 가족은 “타 들어가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나스비의 누나는 “이런 종류의 방송은 출연자의 가족에게는 죽음을 주는 것과 같은 반면 사람들에게는 희열을 준다”고 말했다.
인간의 악마적 면모는 집단화 될 때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이를 돕는 건 시스템이다. 정부나 미디어가 인위적으로 개입하여 사람들의 반응을 유도한다. '나가라! 전파소년'의 기획자 츠치아 토시아 PD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웃기지 않은 사람은 없어요. 평범한 사람에게도 참신한 기획을 붙이면 웃기게 되죠. 그다지 웃기지 않는 장면에도 웃는 소리를 붙이거나, 우스꽝스러운 이모티콘을 붙이면 웃긴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정부의 정책도 비슷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현혹할 때가 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정권 초기 강한 사회 억압 정책을 실시했다. 하지만 국민의 저항이 심해지자 조직적인 대중 우민화 정책으로 노선을 바꿨다. 3S정책(Sex, Sports, Screen)을 통해 대중이 정치적 옳음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물론 한국에선 독재 정부의 의도와 달리, 문화 혁명이 우민화가 아닌 정치 혁명으로 귀결됐지만, 이런 식의 시스템의 '가스라이팅'이 반복되지 않으리란 법은 어디에도 없다.
이미 사회 곳곳에서 집단적 광기의 조짐이 보인다. 신입생 환영회를 명목으로 신입에게 여장을 종용하여 웃음거리 삼거나, 약자의 외모나 말투를 놀림거리 삼는 문화가 대표적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광기로 치닫지 않을까? 조롱하지 않고서 웃길 수는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