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정치인들의 언어에 관하여
흰색 바탕의 모니터를 마주 보고 앉는다. 키보드에 무엇이라도 쓴다. 손목에 힘이 빠져 더 이상 쓰기 어렵다. 흰 배경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압도감을 느껴 이내 책상 바깥으로 나간다. 현관 문을 열고 집 앞거리를 걷는다. 은행 나뭇잎이 색을 잃고 힘없이 주저앉아 있다. 이따금 부는 바람에 넋 놓고 휘청인다.
무력히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며 생각한다. 글을 써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너무 많은 언어가 무력히 넘실대는 세상 속에서 나 하나 의견 보태어서 좋을 게 없다고. 폭력과 혐오를 양산해 내는 추악스러운 언어가 승리하는 세상 속에서, 내가 굳이 힘주어 말할 필요가 없다고.
다리 밑 천 길을 따라 걸어본다. 가을의 햇살이 물에 반사되어 영롱히 빛나고 있다. 나는 감색 벤치에 앉아 물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언어가 무력하다는 말만 되내이며, 분명 어제까지 열심히 읽고 썼던 글이 너무나도 싫어지는 기분 속에 잠기며.
오늘 아침 기자 회견 속 대통령의 모습은 한 마디로 그악스러웠다. 사람을 잘 못 본 건가 싶어 다시 보기만 한 것도 2년. 그간 그가 말하는 자유에는 자유가 없었고,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에는 민주주의가 없었다. 그는 기자회견 내내 ‘민생’을 외쳤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민생만큼 공허한 말은 생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필이면 전날에는 트럼프가 다시 미국의 대통령이 됐다. 그는 수락 연설 내내 ‘MAGA’를 외쳤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이라는 뜻의 줄임말이다. 하지만 그의 연설을 보는 동안에도 무력감이 들었다. 그가 주장하는 미국이 왠지 ‘백인영어권고위층남성’만을 위한 미국같기 때문이었다.
해가 조금씩 옆으로 기운다. 날이 조금 쌀쌀해지기 시작한다. 옷을 동여매고 천 위로 올라온다. 큰 가로수 사이 길을 지나 차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주택가를 걷는다. 오늘만큼은 희망을 말하기가 싫어진다. 무력한 언어가 승리하는 광경을 본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기 때문일까. 오늘만큼은 이 무력감에 빠진 채 걷기로 나를 놓아버린다. 그리고 걷는다. 언어가 쓸모없다고 느끼며.